1. 언어 소멸의 구조적 원인: 개인의 선택이 아닌 제도의 강제

유엔 원주민 문제 상설포럼(UN Permanent Forum on Indigenous Issues)은 2016년 전 세계에서 쓰이는 것으로 추산되는 약 6,700개 언어 가운데 40%가 소멸 위기에 놓여 있다고 밝혔습니다(IDIL 2022–2032 소개). 유네스코는 현재 7,000개가 넘는 언어가 쓰이고 있으며 이번 세기말까지 최대 1,500개 언어가 사라질 수 있다고 추산합니다(UNESCO). 그러나 언어가 소멸의 문턱으로 밀려나는 과정을 단순히 ‘현대화에 적응하지 못해 시대에 뒤처진 결과’나 ‘부모 세대가 모국어를 자녀에게 가르치지 않은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것은 본질을 철저히 왜곡하는 해석입니다. 인류학적·사회언어학적 실증 연구들이 일관되게 증명하듯, 언어 전승의 단절은 언제나 정치적 지배, 식민지적 동화 교육, 토지 박탈, 그리고 공공 행정과 사법·취업 시장에서의 조직적인 언어적 차별이라는 구조적 폭력과 결합되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으로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된 원주민 기숙학교(Residential Schools) 체제는 아동이 모국어를 구사할 때마다 물리적 체벌과 심리적 박탈을 가하며 언어를 강제로 뿌리 뽑았습니다. 공공 행정과 법정에서 오직 지배 언어(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만을 합법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인정하는 제도적 장벽 속에서, 원주민 부모 세대는 자녀가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피하고 경제적 생존 기회를 얻도록 하기 위해 모국어 사용을 스스로 억누르는 비극적 선택으로 내몰렸습니다. 따라서 언어 회복(Revitalization)은 결코 개인들의 문화적 취향이나 향수를 만족시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국가 폭력과 차별적 제도가 파괴한 공동체의 기본권과 언어적 인권을 회복하는 정의의 문제입니다.

2. 화자 수 통계의 함정과 다차원 활력(Vitality) 평가

위기 언어를 진단할 때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단순한 ‘총 화자 수(number of speakers)’라는 단일 숫자에 매몰되는 것입니다. 특정 언어의 화자가 5만 명이나 10만 명에 달하더라도, 그 화자층이 전원 60대 이상의 고령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유아 및 청소년 세대로의 가정 내 언어 전승이 완전히 멈춰 있다면, 그 언어는 통계적 착시 뒤에서 한 세대 만에 급격한 침묵에 빠져들게 됩니다. 반대로 화자 수가 수백 명에 불과하더라도, 어린아이들이 가정과 유치원에서 그 언어로 일상을 공유하고 마을 공동체 안에서 의사소통의 주된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 언어는 강인한 재생산 능력을 보유한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유네스코(UNESCO) 전문가 그룹이 2003년에 발표한 문서 「언어 활력과 소멸 위험(Language Vitality and Endangerment)」은 언어의 활력을 아홉 가지 요인으로 평가하며, 그 첫 번째 요인으로 ‘세대 간 언어 전승(Intergenerational Language Transmission)’을 제시하고 이를 가장 널리 쓰이는 평가 요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문서는 어떤 요인도 단독으로 언어의 활력을 판단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며, 절대 화자 수와 전체 인구 대비 화자 비율, 기존 사용 영역(Domains)의 변화, 새로운 영역과 매체에 대한 대응 등을 함께 살펴볼 것을 권고합니다. 즉 화자 수만으로는 언어의 생명력을 판단할 수 없고, 그 언어가 가정과 공공 영역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다차원적 생태계가 유지되는지가 핵심입니다.

웨일스어(Cymraeg)와 영어가 대등한 크기로 나란히 표기된 영국 웨일스의 이중언어 공공 도로 표지판
1993년·2011년 웨일스어법과 공공부문 의무 기준을 통해 일상 행정과 도로 표지에 웨일스어를 복원한 이중언어 표지판 · Wikimedia Commons contributor · CC BY 2.5 · 위키미디어 공용

이 기준은 화자 수가 같은 두 언어도 처지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위기 언어를 볼 때 '몇 명이 쓰는가'와 함께 '아이들이 이어받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읽을 수 있다.

3. 국제 규범의 진화: UN 총회 결의 74/135와 원주민 언어 국제 10년

국제사회는 2019년 ‘세계 원주민 언어의 해(IYIL 2019)’를 운영한 뒤, 1년짜리 단기 기념사업으로는 수세기에 걸쳐 누적된 언어 소멸 위기를 되돌릴 수 없다는 한계를 확인했습니다. 이에 유엔 총회(UN General Assembly)는 2019년 12월 18일 결의 A/RES/74/135를 채택하여 2022~2032년을 ‘원주민 언어 국제 10년’으로 선포하고, 장기적인 국제 협력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사실은, 원주민 언어 국제 10년을 선포한 주체는 유네스코가 아니라 유엔 총회(UN General Assembly)이며, 총회는 결의 제24항에서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사무국 경제사회국(DESA) 등 관련 기관과 협력해 기존 재원 범위 안에서 ‘선도기관(lead agency)’ 역할을 맡도록 요청(invite)했다는 점입니다. 이 결의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 아니라 권고적 성격의 총회 결의로, 제25항에서 회원국이 원주민과 협력해 적절한 재원을 갖춘 국가 이행 기구 설치를 검토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유엔 총회 결의 A/RES/74/135 제24항의 공식 원문은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24. Proclaims the period 2022–2032 as the International Decade of Indigenous Languages, to draw attention to the critical loss of indigenous languages and the urgent need to preserve, revitalize and promote indigenous languages and to take urgent steps at the national and international levels, and invites the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to serve as the lead agency for the International Decade, in collaboration with the 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 of the Secretariat and other relevant agencies, within existing resources;”

이 결의에 따라 수립된 원주민 언어 국제 10년 글로벌 행동계획(Global Action Plan)과 유네스코 전략 프레임워크는 단순한 언어 아카이빙을 넘어섭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글로벌 행동계획은 비구속적 전략 틀로서, 교육, 디지털 역량 강화, 보건, 사법 접근과 공공서비스 등 10개 주제 영역에 걸쳐 원주민 언어의 사용 범위를 넓히기 위한 조치들을 제안하며, 유엔 원주민권리선언(UNDRIP)의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다만 결의 A/RES/74/135 자체는 제25항에서 회원국에 원주민과의 협력 아래 적절한 재원을 갖춘 국가 이행 기구 설립을 검토하도록 권유(invites Member States to consider)하는 데 그치며, 특정 조항 번호나 2032년까지의 의무적 제도화 시한을 부과하지는 않습니다.

선포 주체와 선도기관을 구별하면, 이 10년이 방향을 제시할 뿐 제도화는 각국의 몫임을 알 수 있다. 뒤에 볼 뉴질랜드·웨일스·제주의 차이도 이 틀에서 읽을 수 있다.

4. 뉴질랜드 마오리어법 2016: 공용어 지위와 이원적 거버넌스 체계

원주민 언어 복원의 세계적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어(Te Reo Māori) 정책은 단순한 행정 지원을 넘어 법률 제정과 전면 개정을 통해 발전해 왔습니다. 1982년 첫 테 코항가 레오(Te Kōhanga Reo, 언어 둥지)가 문을 연 유아 몰입 교육 운동이 풀뿌리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고(Te Kōhanga Reo National Trust 공식 연혁), 1987년 마오리어법(Māori Language Act 1987) 제3조는 마오리어를 뉴질랜드의 공식 언어로 처음 선언했습니다. 이후 뉴질랜드 의회는 2016년 이 1987년 법을 대체하는 Māori Language Act 2016 (Te Ture mō Te Reo Māori 2016, Public Act 2016 No 17)을 제정했습니다.

마오리어법 2016 제5조는 “The Māori language is an official language of New Zealand”라고 명시하여 1987년에 부여된 공식 언어 지위를 재확인했습니다. 나아가 이 법은 국가(Crown)와 이위·마오리의 ‘적극적 파트너십’(제8조 제2항 (i)호)을 해석 원칙으로 삼고, 장관이 발표하는 정부 측 전략(Maihi Karauna, 제10조)과 이위·마오리를 대표해 활동하는 독립 법정기관 테 마타와이가 수립하는 마오리 측 전략(Maihi Māori, 제11조)이 병행하는 이원 거버넌스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 테 타우라 휘리(Te Taura Whiri i te Reo Māori): 법 제37조에 따라 자율 크라운 엔터티(autonomous Crown entity)로 존속하며, 제40조에 따라 장관이 발표하는 정부 측 마오리어 전략(Maihi Karauna, 제10조)의 이행 조정을 주도하고, 마오리어 능력 인증서(번역·통역사 자격) 발급과 명부 관리를 담당합니다 (공식 직무 규정).
  • 테 마타와이(Te Mātāwai): 법 제17조에 따라 설립된 독립 법정기관(법인)으로, 이위(iwi)와 마오리를 대신해 활동합니다(제18조). 위원 13명 가운데 7명은 7개 권역별 이위 클러스터가, 4명은 마오리어 교육·미디어·공동체 단체로 구성된 테 레오 투쿠투쿠(Te Reo Tukutuku) 클러스터가 선임하며, 2명은 정부를 대표해 장관이 임명합니다(제20조). 테 마타와이는 이위와 마오리를 위한 언어 전략(Maihi Māori)을 스스로 정한 방식으로 수립·승인하고(제11조), 이 전략의 이행에 기여하는 서비스와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제19조). 국회 예산으로 지원되는 사업은 매년 장관과 합의하는 구매 협약(purchase agreement, 제24조)을 바탕으로 집행됩니다.

국가(Crown)가 언어 정책을 단독으로 설계하지 않고, 위원 13명 중 11명을 이위 클러스터와 Te Reo Tukutuku 클러스터가 임명하는(제20조) 테 마타와이에 마오리 측 언어 전략의 수립과 관련 사업 운영을 법률로 맡긴 이 제도는, 원주민 언어 부흥에서 당사자 공동체의 참여가 핵심적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다만 테 마타와이의 예산은 장관과 합의하는 구매 협약(purchase agreement)에 따라 매년 국회 심의를 거치므로 재정적 자율성과 정부 감독 사이의 지속적인 조율이 수반됩니다.

뉴질랜드 공공기관과 학교, 거리에 마오리어(Te Reo Māori)와 영어가 함께 적힌 이중언어 안내 표지
1987년 마오리어법(Māori Language Act)으로 공식 언어 지위를 인정받고 ‘코항아 레오(언어 둥지)’ 운동으로 부흥한 뉴질랜드 마오리어 표지 · Mrtimmydee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이 사례는 공용어 지위 선언과 그 언어를 누가 계획하느냐가 별개의 문제임을 보여 준다. 1987년에 얻은 지위를 2016년 법이 거버넌스 설계로 채웠다고 읽을 수 있다.

5. 웨일스어 법(Measure) 2011과 정부법 2006: 공공서비스 의무와 법적 동등성

영국 웨일스는 소수 언어의 공식 지위와, 그 지위를 뒷받침하는 공공서비스 의무를 법률 조문 단위로 정교하게 규정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0세기 동안 화자 수가 크게 줄었던 웨일스어(Cymraeg)를 위해 웨일스 정부는 2017년 7월 전략 Cymraeg 2050을 발표하고 2050년까지 웨일스어 화자 100만 명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다만 영국 통계청(ONS)의 202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웨일스어를 말할 수 있는 3세 이상 주민은 약 53만 8,300명(17.8%)으로 2011년(56만 2천 명, 19.0%)보다 줄어 목표까지는 여전히 상당한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 법적 기틀의 양대 축은 웨일스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 for Wales, 현 Senedd Cymru)가 제정한 2011년 웨일스어 법령(Welsh Language (Wales) Measure 2011)과 영국 의회가 제정한 2006년 웨일스 정부법(Government of Wales Act 2006)입니다.

첫째, 웨일스 의회가 제정한 Welsh Language (Wales) Measure 2011 제1조는 “The Welsh language has official status in Wales(웨일스어는 웨일스에서 공식 지위를 갖는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조항은 웨일스어의 공식 지위를 법률 조문으로 직접 명시한 규정으로, 그 효력 범위는 영국 전체가 아니라 웨일스 지역(in Wales)입니다. 나아가 제2조는 **웨일스어 커미셔너(Welsh Language Commissioner)**를 두고 제1장관(First Minister)이 임명하도록 했으며, 제3조는 커미셔너의 주된 목적을 웨일스어 사용의 촉진·지원(to promote and facilitate the use of the Welsh language)으로 규정했습니다. 커미셔너는 법원이 아니라 국왕의 공무원이 아닌 단독 법인(corporation sole, 부칙 1)이며, 커미셔너의 결정에 대한 불복은 별도의 웨일스어 심판소(Welsh Language Tribunal)가 관할합니다. ‘웨일스어 표준(Welsh Language Standards)’은 제26조에 따라 웨일스 정부 장관들이 규정(regulations)으로 정하고, 커미셔너가 준수 통지(compliance notice, 제44조)를 발부해 공공기관 등에 적용합니다. 2025년 8월부터는 수도 공급 기업인 Dŵr Cymru와 Hafren Dyfrdwy 등 비공공기관에도 표준이 처음 적용되었습니다(Nation.Cymru 보도). 부칙 8은 가스·전기·통신 사업자도 표준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아직 이들 분야에 실제 규정이 제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둘째, 영국 의회가 제정한 권한이양(devolution) 법률인 **Government of Wales Act 2006 (2006 c. 32)**은 세네드(Senedd Cymru)의 의사절차와 웨일스 법령의 두 언어본에 대해 이중언어 동등 원칙을 규정합니다. 동법 제35조(2012년 웨일스 의회 공용어법으로 개정된 현행 조문)는 영어와 웨일스어를 웨일스 의회의 공용어로 정하고, 본회의·위원회 등 의회 의사 진행(proceedings)에서 두 언어를 동등하게 취급(treated on a basis of equality)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나아가 제156조는 영어와 웨일스어 두 언어로 제정된 의회 법령(Measure)과 법률의 영어본과 웨일스어본이 모든 목적에서 동등한 지위(of equal standing)를 갖는다고 규정합니다(2020년 1월 1일 이후 제정된 법령은 Legislation (Wales) Act 2019 제5조가 동일한 효력을 부여). 입법 권한의 경우, 2006년 제정 당시 Schedule 5에는 ‘Field 20: Welsh language’라는 분야명만 있었으나, 2010년 2월 11일 입법권한명령(S.I. 2010/245)을 통해 Matter 20.1(웨일스어 사용 촉진과 동등 대우)이 추가되어 2011년 Measure 제정의 근거가 되었고, 2018년 4월부터는 현행 제108A조의 유보권한 모델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웨일스 사례는 공식 지위 선언이 커미셔너·표준·심판소라는 집행 장치와 맞물려 의무가 됨을 보여 준다. 다만 이 장치가 갖춰진 뒤에도 화자 수가 줄었다는 점은, 제도와 언어 활력을 따로 봐야 함을 알려 준다.

6. 한국 국어기본법과 제주어 조례: 지역어 보전의 명문화와 현실적 한계

한국의 법체계 역시 소수 언어 및 지역어의 보전 필요성을 법령에 명문화하며 제도적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대한민국 국회는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을 통해 국가 언어 정책의 기본 골격을 정립했습니다. 특히 국어기본법 제4조(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제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변화하는 언어 사용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의 국어능력 향상과 지역어 보전 등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 조항은 2005년 제정 당시부터 ‘지역어 보전’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노력해야 할 책무로 법률 본문에 명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선언적 노력 조항에 머물러 있어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서는 자치입법의 뒷받침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에 가장 실질적인 자치법규로 대응한 곳이 제주특별자치도입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이미 2007년 9월 27일 「국어기본법」 제4조에 근거한 제주어 보전 및 육성 조례(제정 당시 조례 제280호)를 제정해 입법적 방파제를 먼저 구축했습니다. 이후 유네스코가 2010년 12월 제주어를 소멸 위기 4단계인 ‘심각한 소멸 위기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분류하자, 제주도의회는 2011년 4월 6일 조례를 개정(조례 제719호)하여 위원회를 개편하는 등 제도를 강화했습니다.

제주어 조례는 한국 자치입법 중 소수 언어 보전을 가장 체계적으로 구체화한 모델입니다. 조례 제4조에 따른 5년 단위 제주어 발전 기본계획 수립, 제8조에 따른 제주어보전육성위원회 설치, 제11조의2에 따른 제주어 표준 표기법 및 어문규범 정립, 제11조의3(2017년 신설)에 따라 제주특별자치도가 설치하거나 발간하는 문화·관광 안내판과 관광 안내 책자에 제주어를 의무적으로 병기하도록 한 규정, 그리고 제16조의 제주어 주간 운영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실행 경로를 법제화했습니다. 현행 조례는 2025년 3월 19일 일부개정된 제주특별자치도조례 제3919호입니다. 하지만 마오리어나 웨일스어의 법제와 비교할 때, 한국의 지역어 법제는 교육 현장에서의 전면적인 몰입 교육 의무 조항이 부재하고, 공공기관의 언어 표준 준수를 강제할 독립적 감독관(Commissioner) 권한이 없으며, 안정적인 재정 확보 구조가 취약하다는 한계를 여전히 안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소멸위기 언어로 분류된 제주어의 삶의 터전이자 제주도 보전 조례와 학교 교육이 이뤄지는 제주 성읍민속마을과 돌하르방
유네스코 소멸위기 4단계(심각한 위기) 판정 이후 제주어 보전 및 육성 조례와 교과·사전 편찬이 진행 중인 제주도의 전통 마을 · Leonard J. DeFrancisci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

웨일스 표준은 커미셔너의 준수 통지로 기관에 적용되고, 비공공기관까지 넓어졌다. 이와 나란히 보면 제주어 병기 의무는 도가 직접 만든 안내물에 머문다는 차이가 드러난다.

7. 기록(Documentation)과 회복(Revitalization)의 분리, 그리고 데이터 주권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과 거대언어모델(LLM)의 폭발적 발전은 위기 언어 분야에 전례 없는 기회와 윤리적 과제를 동시에 제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어 연구자와 정책 입안자들이 반드시 엄격하게 분리해야 할 개념은 ‘언어 문서화(Documentation)’와 ‘언어 활성화(Revitalization)’의 질적 차이입니다. 사전, 문법서, 고해상도 음성·영상 녹음 파일을 클라우드 서버에 영구 보존하는 일은 언어의 귀중한 기록이지만, 서버에 잠든 데이터베이스 그 자체가 새로운 아이 화자를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기록은 보존 작업이고, 회복은 그 언어가 가정과 골목길, 교실에서 아이들의 입을 통해 숨 쉬게 만드는 살아 있는 사회적 실천입니다.

더욱이 빅데이터·오픈 데이터와 AI 학습으로 원주민 언어 자료의 2차 활용이 늘어나면서, 원주민이 자신과 공동체·영토에 관한 데이터에 대해 권리와 이익을 주장하는 **원주민 데이터 주권(Indigenous Data Sovereignty)** 논의가 한층 중요해졌습니다. 2018년 11월 8일 보츠와나 가보로네 워크숍에서 연구데이터연합(RDA) 산하 국제 원주민 데이터 주권 관심그룹이 초안을 마련하고 2019년 9월 글로벌 원주민 데이터 얼라이언스(GIDA)가 승인·공개한 **CARE 원칙**(Collective Benefit, Authority to Control, Responsibility, Ethics)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금지 규정이 아니라, 데이터 개방을 강조하는 FAIR 원칙을 보완하여 원주민 데이터가 공동체의 집단적 이익과 통제권 아래 활용되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거버넌스 원칙입니다. 원주민 언어 자료에 담긴 고유한 생태 지식과 구전 전통은 외부의 무단 상업화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데이터의 접근권과 거버넌스 참여권은 해당 원주민 공동체와 긴밀히 협의되어야 합니다.

앞서 본 '세대 간 언어 전승' 기준과 나란히 보면, 기록만으로는 활력이 회복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데이터 주권 논의는 언어 회복을 권리 문제로 본 앞의 관점이 기록 자료에까지 이어짐을 보여 준다.

8. 네 가지 제도가 보여주는 공통의 교훈: 법과 일상을 잇는 생태계

UN 총회의 국제 10년 결의부터 뉴질랜드, 웨일스, 그리고 한국의 법률과 조례에 이르는 4대 제도적 실험은, 사라져 가는 언어를 되살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명확한 3대 공통 분모를 제시합니다:

  • 첫째, 법률적 공식 지위(Official Status)의 명문화: 법적 권리가 부여되지 않은 언어는 국가 예산 배분, 교과과정 편성, 공공 행정 서비스의 우선순위에서 필연적으로 밀려납니다. 마오리어는 마오리어법 2016 제5조에 따라 뉴질랜드의 공식 언어이며, 웨일스어는 웨일스 의회(National Assembly for Wales)가 통과시킨 Welsh Language (Wales) Measure 2011 제1조에 따라 웨일스 안에서 공식 지위를 갖습니다. 같은 조 제2항은 이 공식 지위가 공공기관의 웨일스어 사용 의무, 영어보다 불리하지 않은 대우, 웨일스 언어 커미셔너 설치 등에 관한 법 조항을 통해 법적 효력을 갖는다고 규정합니다.
  • 둘째, 당사자 공동체 중심의 이원적 거버넌스: 정부 관료 조직이 언어 정책을 독점하면 현장과의 괴리가 발생합니다. 뉴질랜드의 테 마타와이(Te Mātāwai) 모델처럼,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과 지역 주민 공동체가 실질적인 정책 기획권과 자금 집행권을 쥐어야만 살아 있는 회복이 가능합니다.
  • 셋째, 학교와 공공서비스, 가정이 맞물리는 완전한 생태계: 학교에서 아무리 언어를 가르쳐도 병원, 법원, 지방의회, 그리고 모바일 앱과 소셜 미디어에서 그 언어를 쓸 수 없다면 젊은 화자는 성인이 되는 순간 지배 언어로 이탈합니다. 법률은 언어를 쓸 수 있는 공공의 영역(Domain)을 체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언어의 일상적 효용 가치를 지탱해 주어야 합니다.

결국 언어를 살리는 길은 흘러간 옛말을 수집해 서고에 보관하는 골동품 보존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고유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회적 불이익 없이 미래를 기획하고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권리와 공간을 보장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