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구운몽(九雲夢)》의 창작 시기는 1687년 선천 유배기로 좁혀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 천리대학교 소장본 『서포연보(西浦年譜)』가 출현해 선천 유배 시기로 확실해졌다고 적는다. 같은 사전은 작품의 완성을 남해 유배 시기로 추정한다. 이 글의 범위는 창작 시기 논쟁과 한문본·국문본의 선후 문제, 그리고 제1회 서두 장면이다. 이 글은 3부작 가운데 1부다.
판본의 선후도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김태준(金台俊)은 김만중(金萬重)이 국문으로 창작한 것을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정규복(丁奎福)은 이 국문 원작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한문 '을사본'의 모본이자 최고본인 한문 '노존본'을 발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규복이 국문 '서울대학교본'과 국문 '노존본'이 한문 노존본의 번역본임을 증명했다고 전한다.
제1회 서두는 성진(性真)이 떨어지는 한 장면으로 이야기의 틀을 미리 보여 주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무대는 중국 형산(衡山)의 연화봉이다. 성진은 스승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팔선녀와 희롱한다. 육관대사(六觀大師)는 그를 풍도(酆都)의 염왕에게 보내라고 분부한다. 성진이 환생할 곳은 당나라 회남도 수주의 양처사 집으로 지정된다.
김만중의 생애와 『서포만필』
김만중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1637년(인조 15)에 태어나 1692년(숙종 18)에 사망했다고 적는다. 같은 사전은 그가 1686년(숙종 12)에 대제학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그의 시편이 363수에 이른다고 적는다.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이 그의 저술로 함께 거론된다.
『서포만필(西浦漫筆)』은 그의 글을 모은 책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책이 2권 1책 필사본이며 상권에 104조, 하권에 161조가 실려 있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이 책에 불가에 대한 작자의 긍정적 시각이 여러 번 나타난다고 적고, 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해 필사본으로 전해졌다고 전한다. 이본으로는 등사본인 문림사본과 고려대학교 도서관본이 있고, 수사본으로 조윤제·이가원·임창순 본과 국립중앙도서관본이 있다. 1971년에 통문관에서 『서포집』과 합책 영인되었고, 1987년에 홍인표가 일지사에서, 2010년에 심경호가 문학동네에서 역주서를 냈다.
이 책에는 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로 시문을 짓는다면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고 전한다. 같은 사전은 그가 한문을 '타국지언(他國之言)'으로 보았고,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 가사를 굴원(屈原)의 「이소」에 견주었다고 적는다. 『서포만필』 항목은 그가 조선 사람은 조선의 말로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고 정리한다. 다만 이 주장과 《구운몽》 본문의 원작 언어 문제는 서로 다른 층위로 볼 수 있다.
작품의 연대 표기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구운몽》을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이 지은 고전 소설로 소개하고, 창작 연도를 1687년으로 적는다. 일본 코토뱅크(kotobank)에 실린 세계대백과사전은 그가 1690년(숙종 16) 왕자 책립 문제로 남해에 유배되었고, 그 기간에 고향의 노모를 위로하려고 이 작품을 지었다고 전한다. 같은 사이트의 일본대백과전서(닛포니카)는 《구운몽》을 17세기 후반 이조 중기의 한글 소설로 분류하고 작자를 김만중으로 적는다. 사전마다 연대와 언어 표기가 갈린다는 사실이 여기서 확인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소설변증설」과 『서포연보』
창작 상황을 전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기록은 후대의 전승이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이 그 기록을 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운몽」 항목은 이 대목을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라고 옮긴다. 이 전승은 집필 동기와 속도를 말하지만 유배지를 특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승만으로는 연대를 정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연대 논쟁의 후보는 둘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운몽」 항목은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이윤(李昀)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 간 1687년(숙종 13)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仁顯王后)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 때문에 남해로 귀양 간 1689년(숙종 15)인지가 확실하지 않다'라고 적었다. 두 후보는 유배지와 사건이 서로 다르다. 작자의 연보는 두 시점을 모두 담고 있다. 그래서 전승과 연보를 함께 놓고 따져야 하는 문제가 된다.
김만중의 연보는 다음 순서로 이어진다. 그는 1687년(숙종 13)에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의 계기를 두 사전 항목이 다르게 적고 있는 셈이다. 그는 1688년(숙종 14) 11월에 배소에서 풀려났다. 그는 1689년(숙종 15) 2월에 집의 박진규(朴鎭圭)와 장령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을 입어 남해(南海)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는 1692년(숙종 18) 남해의 적소에서 56세로 숨을 거두었다.
논쟁은 새 자료로 정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 천리대학교 소장본 『서포연보』의 출현으로 창작 시기가 선천 유배 시기로 확실해졌다고 적고, 완성 시기를 남해 유배 시기로 추정한다. 『서포만필』도 본문의 '여재서새시(余在西塞時)'라는 대목으로 보아 1687년 선천 유배 이후인 말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위키문헌 한국어판의 「구운몽」 국문본 안내는 이 작품을 1689년 작으로 표기하고, 김만중이 남해 유배 시절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고 소개한다. 표기가 갈리는 자료를 함께 보면, 전승과 연보 기록을 구분해 읽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김태준의 국문 원작설과 정규복의 노존본
원작의 언어를 둘러싼 논쟁은 두 단계로 전개되었다. 김태준은 《구운몽》도 『사씨남정기』와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그는 김만중이 국문으로 창작한 것을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 견해에서는 국문본이 앞서고 한문본이 뒤따른다. 국문 '서울대학교본'과 국문 '노존본'도 이전까지 원본에 가깝다고 추정되었다.
정규복은 이 국문 원작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한문 '을사본'의 모본이자 최고본인 한문 '노존본'을 발견했다. 그는 국문 '서울대학교본'과 국문 '노존본'이 한문 노존본과 같은 계통이며 그 번역본임을 증명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한문 원작설을 주장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서포문중설화(西浦門中說話)'도 한문 원작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었다고 적는다.
논쟁의 틀을 알면 서두 장면을 읽는 눈도 달라진다. 코토뱅크에 실린 세계대백과사전은 작품의 무대를 중국 형산의 연화봉으로 적는다. 같은 설명은 은자 육관대사가 제자 성진에게 인생의 무상과 윤회 사상을 깨우치려 한다고 전한다. 같은 사이트의 일본대백과전서는 성진이 스승의 심부름으로 동정호 용왕에게 갔다 오는 길에 팔선녀와 희롱하여 수행에 몸을 붙이지 못하고, 팔선녀와 함께 천계에서 쫓겨난다고 적는다. 서두가 이렇게 짧은 만큼, 본문 대조는 몇 문장만으로도 계통을 가늠하는 작업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노존본에서 을사본으로, 을사본에서 계해본으로
판본의 수는 많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725년(영조 1)에 간행된 금성판(錦城板) 한문 목판본을 먼저 든다. 같은 항목은 국문 방각본, 국문 필사본, 국문 활자본, 한문 필사본, 한문 현토본 등 50여 종이 넘는 이본이 전한다고 적는다. 이본의 갈래가 국문과 한문 양쪽에 걸쳐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문본의 선후는 세 이름으로 정리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문본이 노존본에서 을사본으로, 을사본은 다시 계해본으로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고 적는다. 노존본은 1725년 이전, 을사본은 1725년, 계해본은 1803년으로 표기된다. 국문본도 각 계통의 국역본으로 분류된다. 세 이름과 세 연대를 기억해 두면 이본 목록을 읽기가 쉬워진다고 볼 수 있다.
이본이 많아도 이야기의 큰 틀은 공유된다. 코토뱅크에 실린 일본대백과전서는 인간계에 환생한 성진이 크게 출세한다고 적는다. 같은 설명은 성진이 함께 환생한 팔선녀와 차례로 맺어져 영화를 누린다고 전한다. 같은 자료는 그가 만년에 고승의 설법으로 깨달아 본래의 성진과 선녀로 돌아가고 극락정토로 돌아간다고 적는다. 제1회의 추방 장면은 이 큰 틀의 입구에 놓인 대목으로 볼 수 있다.
한문본 제1회의 오악과 육관대사
한문본 제1회는 공간을 먼저 세운다. 위키문헌 중국어판 「九雲夢」 제1회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天下名山曰有五焉:東曰「東岳」,即泰山;西曰「西岳」,即華山;南曰「南岳」,即衡山;北曰「北岳」,即恆山。' 우리말로 옮기면 천하의 이름난 산이 다섯 있다고 밝힌 뒤, 동악 태산과 서악 화산과 남악 형산과 북악 항산을 차례로 든다. 인물보다 산의 이름이 앞에 온다. 이야기가 형산 연화봉으로 좁혀 들어갈 자리를 서두에서 미리 마련한 짜임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인물이 등장한다. 같은 제1회는 노승을 '其和尚惟手持金剛經一卷,或稱「六如和尚」,或稱「六觀大師」,弟子五六百人中,修戒得神通者,三十餘人。'이라고 소개한다. 노승은 금강경 한 권을 손에 들고 있으며, 육여화상 또는 육관대사로 불린다. 제자 오륙백 인 가운데 계를 닦아 신통을 얻은 자는 삼십여 인으로 적힌다. 같은 제1회는 성진을 '有小闍利名「性真」者,貌瑩冰雪,神凝秋水,年僅二十歲。'라고 적어 그의 나이를 스무 살로 명시한다. 숫자가 이렇게 쌓이면 서두의 공간과 집단이 구체적인 규모로 제시된다.
성진의 성게는 말 한마디로 드러난다. 위키문헌 중국어판 「九雲夢」 제1회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 '性真固讓曰:「酒者伐性之狂藥,即佛家大戒,賤僧不敢飲也。」' 성진은 술을 성품을 해치는 광약이라 부르고, 불가의 큰 계율이라며 사양한다. 이 사양은 그가 계율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뒤에 올 추방 장면과 나란히 놓으면, 서두가 한 인물의 두 모습을 짧은 거리 안에 배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꾸짖음과 처분도 항목을 나누어 제시된다. 같은 제1회는 '修行之功其目有三;日身也,日童也,日心也。'라고 적는다. 위키문헌 중국어판 본문의 표기를 그대로 옮긴 구절이며, 수행의 공부를 몸과 입과 마음 셋으로 든 대목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선방에 돌아온 성진이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와 공명을 원하다가, 육관대사에 의하여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된다고 정리한다. 같은 제1회에서 육관대사는 '大師吩咐曰:「汝領此罪人往酆都,變付於閻王而回。」'라고 분부하고, 환생지는 '此地即大唐國淮南道秀州縣也。此家即楊處士家也。'로 지정된다. 꾸짖음과 호송 명령과 환생지 지정이 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구성으로 볼 수 있다.
국문본 상권 서두와 한문본 제1회의 대조
국문본의 체재는 한문본과 다르다. 위키문헌 한국어판의 「구운몽」 국문본은 장회체가 아니라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다. 본문은 옛한글 표기로 되어 있어, 관련 글꼴이 없으면 일부 문자가 깨진 글자로 보인다. 한문본은 회(回)로 나뉘며, 위키문헌 중국어판에는 「九雲夢」 제1회가 실려 있다. 한문본의 전체 회수는 이 글이 사용한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두 문장은 두 본이 같은 순서를 따른다. 위키문헌 한국어판 「구운몽」 국문본의 첫 대목은 다음과 같다. '천하 명산이 다셧시 잇스니 동의는 동악 태샨이오, 셔의는 셔악 화샨이오, 남의는 남악 형샨이오, 북의는 북악 항샨이오, 가온대ᄂᆞᆫ 즁악 슝샨니라.' 국문본은 가운데 숭산까지 다섯 산을 모두 적는다. 근거로 삼은 한문본 인용 구절은 북악 항산까지 이어지고, 중악은 인용 범위 밖에 있다. 두 본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세운다는 점은 그대로 확인된다.
세부 항목을 나란히 놓으면 대응이 더 분명해진다. 노승의 호칭은 한문본에서 '六如和尚' 또는 '六觀大師'이고, 국문본에서는 '졔ᄌᆞ 오육ᄇᆡᆨ 인을 ᄃᆞ리고 년화봉샹의 볍당을 크게 지어시니, 혹 왈 육여화샹니오, 혹 왈 육관대ᄉᆞ라'로 적힌다. 술을 사양하는 말은 국문본에서 '슐은 광약이라. 불가의 큰 경게온이 감이 먹지 못하리로소이다.'로 나온다. 호송 분부는 국문본에서 '이 죄인을 영거ᄒᆞ여 풍도의 가 염왕ᄭᅴ 부치라.'이고, 환생지는 '이 ᄯᅡ은 곳 당나라 회남도 슈쥬 고을이오, 이 집은 냥쳐ᄉᆞ의 집이라.'로 적힌다. 호칭과 사양하는 말과 호송 분부와 환생지가 모두 대응하므로, 두 본이 같은 계통의 본문을 공유한다는 설명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국문본에서 성진은 백팔 염주를 값으로 바치게다고 말한 뒤 도화 한 가지를 던진다. 팔선녀가 그 꽃을 구경하는 사이 꽃은 변하여 네 쌍 구슬이 된다. 원문을 직접 읽으려는 독자는 위키문헌 중국어판의 「九雲夢」 제1회와 위키문헌 한국어판의 「구운몽」 국문본을 함께 펼쳐 보면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작자와 이본, 판본 계통을 정리한 항목을 제공한다. 본문 대조는 판본 논쟁을 따라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옥루몽》과 《구운몽》의 수용
이본의 분포는 독자층을 가늠하는 단서가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구운몽》의 한문본과 국문본의 비중이 거의 같다는 점을 지적한다. 같은 항목은 이 점이 계층과 성별의 구분을 넘어서 《구운몽》이 수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적는다. 한문본과 국문본을 모두 세어야 수용의 폭이 보인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후대 작품에 대한 서술도 남아 있다. 코토뱅크에 실린 세계대백과사전은 이 작품이 발표되자 큰 반향을 부랐다고 적는다. 같은 설명은 《옥루몽》과 《옥련몽》을 비롯한 많은 아류작이 나왔다고 전한다. 다만 각 작품의 연대와 작자는 이 글이 사용한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작품의 성게에 대한 평가도 함께 전한다. 코토뱅크에 실린 설명은 이 작품이 조선에서 '꿈'을 매개로 한 소설의 선구가 되었고, 작자명을 명기해 발표한 점에도 의의가 있다고 적는다. 같은 자료는 작품에 일부다처의 합리화와 유교·불교·도교 세 가르침의 혼연한 일치, 낙천적인 향락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이 평가는 제1회의 추방 장면과 결말의 깨달음을 함께 놓고 읽을 때 검토할 수 있는 항목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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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세 가지가 남는다. 첫째, 창작 시기는 일본 천리대학교 소장본 『서포연보』의 출현으로 1687년 선천 유배 시기로 확실해졌고, 완성은 남해 유배 시기로 추정된다. 둘째, 한문본은 노존본에서 을사본으로, 을사본에서 계해본으로 이어지며, 정규복은 국문 '서울대학교본'과 국문 '노존본'이 한문 노존본의 번역본임을 증명했다. 셋째, 제1회 서두는 오악 열거에서 시작해 육관대사와 성진을 세우고, 풍도 호송과 양처사 집 지정으로 닫힌다.
독자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본문 대조다. 위키문헌 중국어판 「九雲夢」 제1회와 위키문헌 한국어판 「구운몽」 국문본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항목을 적는다. 창작 연대를 다르게 표기한 자료가 함께 남아 있다는 점도 확인된다. 2부와 3부에서 다룰 내용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