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과 이 글의 범위
나전칠기(螺鈿漆器)는 조개껍데기를 얇게 갈아 오려서 옻칠한 기물에 붙인 공예품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나전을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형태로 오려 기물의 표면에 감입시켜 꾸미는 칠공예의 장식기법”으로 풀이한다.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설명도 나전장을 나무로 짠 가구나 기물 위에 전복이나 조개껍질을 갈고 문양을 오려서 옻칠로 붙이는 기술이라고 적는다. 두 설명을 나란히 놓으면 이 공예의 핵심은 껍데기와 옻칠의 결합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껍데기만 있어도, 옻칠만 있어도 나전칠기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껍데기는 무늬를 만들고 옻칠은 그 무늬를 바탕에 붙이고 덮는다. 한국에서는 남해산 전복껍데기가 전통적으로 쓰였다고 기록된다.
다루는 범위는 자개 재료와 제작 공정, 줄음질과 끊음질, 고려와 조선의 기록, 통영과 원주, 중국과 일본 나전과의 비교까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적은 야광패와 전복껍데기
자개는 아무 껍데기로나 만들지 않는다.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설명은 “자개의 재료는 전복, 소라, 진주조개가 주로 사용되며, 남해안과 제주도 근해에서 나는 것이 아름답고 우수하다”라고 적는다. 재료를 고르는 기준이 종류와 산지 두 갈래로 제시된 셈이다. 영어 위키백과 ‘Najeonchilgi’ 항목도 한국 장인들이 일반적으로 가공한 전복 껍데기를 쓴다고 설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장’ 항목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빛깔이 영롱한 남해산 전복껍데기를 사용하였다고 적는다.
껍데기의 종류는 처음부터 전복이 아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그 전래의 초기에는 주로 백색의 야광패(夜光貝)를 사용하였으나 후대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청록빛깔을 띤 복잡한 색상의 전복껍데기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흰 껍데기에서 청록빛 껍데기로 쓰임이 옮겨 갔다는 서술이다. 색이 단순한 재료에서 색이 복잡한 재료로 선택이 바뀐 흐름으로 읽을 수 있다. 바뀐 까닭은 이 기록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옻칠에도 산지가 따로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나전칠기’ 항목은 평안북도 태천, 강원도 원주, 경상남도 함양, 함경남도 신흥을 산지로 언급한다. 같은 항목은 요즈음 강원도 원주가 대표적인 옻 산지로 우수한 옻칠을 생산하지만 생산량이 적어 많은 양을 수입에 의존한다고 적는다.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설명도 강원특버자치도 원주가 우수한 옻칠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쓴다.
껍데기 쪽에서도 공급 문제가 적혀 있다. 영어 위키백과 ‘Najeonchilgi’ 항목은 수요가 많아 전복 껍데기 공급이 줄어들면서 호주와 대만, 필리핀 같은 곳에서 소라와 진주조개 껍데기를 수입했다고 설명한다. 같은 항목은 현대의 대량생산과 옻칠 대신 쓰는 캐슈 칠 같은 새 재료가 내구성과 진정성 측면에서 문제를 낳기도 한다고 적는다. 재료 수급과 재료 대체가 함께 기록된 대목으로 볼 수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이 적은 베싸기와 옻칠 건조 조건
제작은 백골에서 시작된다.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설명은 나무로 기본 틀인 백골을 짜고 그 표면을 사포로 문지르거나 틈새를 메워 고르게 한 다음 자개를 붙인다고 적는다. 그 뒤 연마와 옻칠과 광내기 과정을 거쳐 완성한다고 이어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 ‘Najeonchilgi’ 항목은 바탕을 만드는 재료로 나무와 두껍게 붙인 종이, 금속, 자기를 든다. 같은 항목은 공정이 서른 단계가 넘는다고 설명한다.
백골을 다루는 공정에는 까닭이 적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나전칠기’ 항목은 이렇게 쓴다. “베싸기를 하는 이유는 나전칠기가 완성된 후 나무로 된 백골이 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겉을 꾸미기 전에 바탕이 변형되는 일을 먼저 막는다는 서술이다. 장식 공정보다 바탕 공정이 앞선다는 점을 보여 주는 문장으로 볼 수 있다.
옻칠은 조건이 까다롭다. 같은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이때 옻칠은 70~80%의 높은 습도와 20~30℃의 높은 온도에서만 마르기 때문에 칠장漆欌 안에서 말려야 하며, 한 번 칠을 하고 말리는 공정마다 하루 이상의 건조 시간이 걸린다.” 칠을 올리는 일보다 말리는 일이 시간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같은 항목은 나전칠기 한 점을 완성하는 데 100번 이상의 손이 간다고 할 정도라고 설명한다. 공정 수와 건조 시간이 겹치면서 제작 기간이 길어지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이름에도 공정이 들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대체로 칠 바탕 위에 자개를 붙이고 다시 칠을 올린 뒤 표면을 연마하여 무늬가 드러나게 하기 때문에 나전에는 으레 칠이라는 말을 붙여 나전칠기라고 쓰는 것이 상례이다”라고 적는다. 자개는 붙인 뒤 한 번 덮이고, 연마를 거쳐 다시 드러난다. 무늬가 칠 위에 얹히는 것이 아니라 칠 속에서 나타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전’ 뒤에 ‘칠기’가 따라붙는다고 설명된다.
백골장과 칠장과 나전장의 분업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을 맡는 구조는 아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장’ 항목은 “전통적으로 나전 칠기는 백골장(白骨匠)과 칠장(漆匠), 나전장의 분업으로 제작되었다”라고 적는다. 틀을 짜는 사람과 칠을 하는 사람과 자개를 붙이는 사람이 나뉘어 있었다는 서술이다.
나전장의 몫은 자개를 다루는 데 있다. 같은 항목은 나전장이 나전을 문양대로 자르고 오려서 옻칠 바탕 위에 부레풀이나 아교를 사용하여 붙인다고 적는다. 접착에 쓰는 재료가 부레풀과 아교로 적혀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같은 항목은 문양을 부착한 뒤 표면에 묽은 생칠(生漆)을 바르고 건조시켜 나전을 옻칠 바탕에 단단히 고정시킨다고 설명한다. 붙이는 공정과 고정하는 공정이 따로 적혀 있는 셈이다.
마무리는 다시 칠과 연마로 돌아간다. 같은 항목은 나전 장식이 끝나면 문양과 칠면(漆面)이 수평이 되도록 옻칠을 반복해서 칠한 후 연마하고 광을 내어 마무리한다고 적는다. 자개와 칠면의 높이를 맞추는 일이 마무리의 목표로 제시된다. 표면이 한 면처럼 느껴지는 까닭을 이 서술에서 읽을 수 있다.
주름질과 끊음질, 그리고 줄음질
기법을 가르는 기준은 자개를 면으로 쓰는지 선으로 쓰는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주름질은 본래 자개를 줄로 썰어 물건의 형상 그대로 오려붙이는 솜씨이며, 끊음질은 거두로 실같은 자개상자를 만들어 끊어 붙임으로써 무늬를 선묘(線描)하는 것을 말한다.” 한쪽은 형상을 통째로 오려 붙이고, 다른 한쪽은 가는 자개를 끊어 가며 선을 그린다. 같은 재료로 전혀 다른 그림을 만드는 두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도구도 다르게 적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나전칠기’ 항목은 이렇게 쓴다. “줄음질은 문양대로 오린 자개에 아교阿膠를 바르고 칠바탕 위에 붙인 후 인두로 지져서 붙이는 방법이며, 끊음질은 가느다란 상사자개를 아교를 칠한 칠바탕에 대고 칼로 똑똑 끊어 가며 문양대로 붙이는 기법이다.” 한쪽에는 인두가, 다른 쪽에는 칼이 등장한다. 공정의 차이가 손에 쥐는 도구의 차이로 드러난다고 읽을 수 있다.
무엇을 그리는지도 함께 적혀 있다.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설명은 자개를 문질러 얇게 만들어 국화, 대나무, 거북이 등 각종 도안 문양을 만드는 줄음질 기법이 있다고 쓴다. 영어 위키백과 ‘Najeonchilgi’ 항목은 자개 조각을 자르는 방식이 줄음질과 끊음질 두 가지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주름질’, 한국민속대백과사전과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설명은 ‘줄음질’이라는 말을 쓴다. 두 설명이 모두 자개를 문양대로 오려 칠 바탕에 붙이는 공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껍데기의 두께에도 분류가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 ‘螺鈿’ 항목은 후패와 박패에 명확한 기준은 없다고 적으면서, 후패를 1.5mm에서 3.0mm, 박패를 0.3mm에서 1.0mm로 분류하는 예를 든다. 같은 항목은 패편 백 장을 겹친 두께를 단위로 삼는 예도 있다고 설명한다. 두께는 숫자로 고정된 규격이 아니라 분류의 한 방식으로 제시된 셈이다.
『동국문헌비고』와 『선화봉사고려도경』의 고려 나전
문헌 기록은 선물에서 시작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고려시대 나전에 관한 문헌상의 첫 기록으로 11세기에 문종이 요나라 왕실에 나전칠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동국문헌비고』의 기록을 든다. 같은 항목은 당시 고려 나전에 대한 평가가 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잘 나타나 있다고 적는다. 외교 선물과 외부인의 기록이 함께 남은 사례로 볼 수 있다.
평가 문장은 짧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장’ 항목은 1124년에 쓰여진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而螺鈿之工 細密可貴)”고 기록된 사실을 전한다. 칭찬의 근거가 세밀함 하나로 적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재료의 희귀함이나 크기가 아니라 손의 정밀함이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고 읽을 수 있다. 같은 항목은 이 기록에서 고려시대 나전 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고 쓴다.
남은 유물은 많지 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현존하는 고려의 나전칠기 유물이 국내외를 통틀어 15점 남짓이며 그 대부분이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 흩어져 있다고 적는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나전칠기’ 항목은 고려시대 나전칠기 유물이 전 세계에 2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쓴다. 두 설명의 숫자가 다르므로 정확한 수는 하나로 확정되지 않는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국내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나전경함, 나전국화넝쿨무늬자합, 나전 대모 국당초문 불자 3점만이 남아 있다고 적는다.
왕조 전체에 대한 서술도 있다. 영어 위키백과 ‘Najeonchilgi’ 항목은 고려(918~1392)가 이 공예의 황금기로 꼽힐다고 적으며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현존 유물로 불가에서 쓰던 경함과 염부합, 향갑, 불자와 화장구로 알려진 모자합, 유병, 작은 상자 등을 든다. 쓰임이 종교와 생활 양쪽에 걸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경공장 나전장과 통영 통제영
조선에서는 나전장이 관청 안에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장’ 항목은 조선시대에 나전장이 경공장으로 공조(工曹)에 2인, 상의원(尙衣院)에 1인이 배치되어 왕실에 필요한 나전 칠기를 제작하였다고 적는다. 인원이 세 명으로 적힌 점이 눈에 띈다. 생산의 한쪽이 왕실 수요에 맞춤져 있었다고 읽을 수 있다.
무늬는 시기별로 달라진다.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설명은 나전 무늬가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모란·국화·연꽃 등의 식물무늬가, 조선 중기에는 화조·쌍학·포도·사군자 등의 무늬가 주로 사용되었다고 적는다. 식물 중심에서 새와 동물이 섞인 구성으로 소재가 넓어진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변화의 원인은 이 설명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지역 제작도 기록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장’ 항목은 임진왜란 이후 통제영(統制營)이 설치되었던 경상남도 통영(統營)에서도 진상용 나전 칠기를 제작하였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색상이 아름답고 껍데기에 굴곡이 적은 전복이 많이 생산되는 통영에 공업전수소(工業傳修所)가 일찍부터 개설되어 나전칠공예의 실기를 가르쳤고 가내수공업의 사설공장이 무수히 번창하였다고 쓴다.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설명도 현재 나전칠기로 가장 유명한 지역이 경남 통영이라고 적는다. 재료와 교육과 공장이 한 지역에 겹쳐 있었다는 서술로 볼 수 있다.
제도 쪽 기록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나전칠공예를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하여 주름질 중심의 기능을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으로 지정하였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이 종목이 현재 국가무형유산이라고 밝힌다. 두 기법 가운데 어느 쪽이 지정의 중심에 놓였는지가 이 문장에 드러난다.
쇼소인 보물과 원대 박패, 고려 박패의 비교
고려 자개의 특징은 얇음으로 적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전’ 항목은 이 시대의 자개가 전복껍데기를 종잇장같이 얇게 갈아서 사용하고 있으며, 야광패나 소라 등도 두껍게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고 쓴다. 일본어 위키백과 ‘螺鈿’ 항목도 고려 시대에 박패 나전을 특징으로 하는 고려 나전이 보인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기법의 발생이나 전래는 분명하지 않지만 유례로 보아 중국 원대 나전보다 앞서질 가능성도 지적된다고 설명한다. 발생 경로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적혀 있다.
중국과 일본 쪽 서술은 시기별로 갈린다. 일본어 위키백과 ‘螺鈿’ 항목은 당대에 나전법이 크게 발달했고, 발견 예는 적지만 일본 쇼소인(正倉院) 보물에서 두꺼운 패각의 나전법과 다양한 장착법을 보여 준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일본에서 나전이 나라시대에 당에서 들어왔다고 설명한다. 같은 항목은 나전 기술이 송대에는 거의 계승되지 않고 쇠퇴했으며, 일본과 고려의 나전이 중국에서도 평가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쓴다. 기술의 중심이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는 서술로 읽을 수 있다.
조선 초기 쪽 서술은 방향이 다르다. 같은 항목은 원대가 되면 얇은 패각에 의한 새로운 나전법이 출현하고 이후 중국에서 박패 나전법이 주류가 되었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고려 나전을 계승한 흔적이 없고, 초기 조선 나전은 다소 두꺼운 패각을 써서 독특한 곡선을 가진 모란당초가 주류였다고 설명한다. 얇음에서 두꺼움으로 바뀐 서술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차이를 항목별로 나란히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첫째, 패각 두께는 고려가 종잇장처럼 얇은 쪽, 쇼소인 보물과 초기 조선 나전이 두꺼운 쪽으로 적혀 있다. 둘째, 일본은 나전이 나라시대에 당에서 들어왔다고 기록된다. 셋째, 중국에서는 당대에 발달했다가 송대에 쇠퇴하고 원대에 박패 나전법이 주류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나전칠기’ 항목은 나전칠기가 옻나무가 자생하는 중국·일본·베트남·미얀마 등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발전되어 왔으며 특히 한국의 나전칠기가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적는다. 이는 그 항목의 평가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확하다.
| 구분 | 패각과 기법에 관한 서술 | 시기에 관한 서술 |
|---|---|---|
| 고려 나전 | 전복껍데기를 종잇장같이 얇게 갈아 사용하고, 두껍게 쓴 예를 찾아볼 수 없다 | 박패 나전을 특징으로 하며, 유례로 보아 중국 원대 나전보다 앞서질 가능성도 지적된다 |
| 초기 조선 나전 | 다소 두꺼운 패각으로 독특한 곡선의 모란당초가 주류였다 | 고려 나전을 계승한 흔적이 없다고 적혀 있다 |
| 중국 | 원대에 얇은 패각에 의한 새 나전법이 출현해 이후 박패 나전법이 주류가 되었다 | 당대에 나전법이 크게 발달했고 송대에는 거의 계승되지 않고 쇠퇴했다 |
| 일본 | 쇼소인 보물에서 두꺼운 패각의 나전법과 다양한 장착법을 볼 수 있다 | 나전은 나라시대에 당에서 들어왔다 |
| 두께 분류 | 후패 1.5~3.0mm, 박패 0.3~1.0mm로 분류하는 예가 있다 | 후패와 박패에 명확한 기준은 없다고 적혀 있다 |
함께 읽기: 노리개는 왜 세 개를 한 벌로 달았을까 · 조선의 갓은 어떻게 제도가 되었는가: 법전·실록과 갓일의 세 장인
정리
나전칠기를 이해하는 열쇠는 껍데기가 아니라 껍데기와 칠의 순서에 있다. 자개를 붙이고 칠을 올린 뒤 연마해 무늬를 드러낸다는 서술이 명칭의 근거로 적혀 있다. 재료는 전복과 소라와 진주조개 껍데기가 주로 쓰이고, 한국에서는 남해산 전복껍데기가 전통적으로 쓰였다고 기록된다. 기법은 문양대로 오려 붙이는 쪽과 가는 자개를 끊어 붙여 선을 그리는 쪽으로 나뉜다. 고려 나전은 얇은 패각으로, 초기 조선 나전은 다소 두꺼운 패각으로 적혀 있어 두께만으로 하나의 전통을 말하기는 어렵다.
원문 구절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나전’ 항목과 ‘나전장’ 항목,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나전칠기’ 항목, 그리고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소개 문서가 이 글에서 인용한 문장의 출처다. 일본어 위키백과 ‘螺鈿’ 항목과 영어 위키백과 ‘Najeonchilgi’ 항목도 함께 비교해 읽을 수 있다. 고려 나전칠기의 현존 수가 15점 남짓과 20여 점으로 다르게 적힌 대목처럼, 설명마다 숫자가 어긋나는 지점은 그대로 남겨 두는 편이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