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공방, 제비초리 위에서 울리는 가느다란 실톱 소리

경남 통영과 서울의 오래된 나전 공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들리는 소리는 ‘사각, 사각, 사각’ 하고 얇은 조개껍데기를 갉아내는 실톱 소리다. 작업대 앞이 V자 모양으로 파인 나무 받침대 ‘제비초리’ 위에 남해안 전복 껍데기를 종잇장보다 얇은 0.1~0.2mm 두께로 갈아 만든 자개 판이 놓여 있다. 국가무형유산 나전장(螺鈿匠)은 돋보기안경을 쓴 채 머리카락보다 얇은 강철 실톱날을 수직으로 세워, 자개 판 위에 붙인 국화꽃과 학의 날개 깃털 한 올 한 올을 오려낸다. 손끝의 힘이 조금만 과해도 바스러지는 진주층을 다루기에 장인은 숨소리마저 고르며 칼끝과 톱날을 움직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세기 조선 나전 모란 넝쿨 무늬 문서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세기 조선 나전 문서함. 옻칠 바탕 위에 오려 붙인 전복 자개 조각들이 빛의 각도에 따라 영롱한 무지갯빛을 발한다. · Ismoon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나전(螺鈿)이란 소라 나(螺) 자에 비녀 전(鈿) 자를 써서, 조개껍데기의 안쪽 진주층을 얇게 가공해 기물 표면에 박아 넣는 장식 기법을 뜻한다. 여기에 옻나무 수액인 천연 옻칠을 결합한 공예가 바로 나전칠기(螺鈿漆器)다. 천 년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는 고려 나전경함과 조선 시대 혼수 함의 영롱한 무지갯빛은, 나무 바탕재 준비부터 30~40단계에 이르는 고된 수작업 공정 끝에 탄생한다.

남해안 전복 진주층이 만드는 나노미터의 빛

나전칠기의 빛깔은 물감이나 인공 안료로 칠한 색이 아니다. 수온이 낮고 조류가 거센 남해안과 제주 인근 바다에서 자란 전복(특히 말전복·참전복)과 야광패·진주패 껍데기 안쪽에는 탄산칼슘(아라고나이트) 결정판과 단백질(콘키올린) 막이 수백 나노미터(nm) 두께로 겹겹이 쌓인 진주층(Nacre)이 형성된다.

전복 껍데기 안쪽 천연 진주층(Nacre)의 무지갯빛 광택
나전칠기의 주재료인 전복(Haliotis) 껍데기 안쪽 진주층. 탄산칼슘 결정판과 유기질 층이 나노미터 두께로 겹쳐져 프리즘처럼 빛을 반사한다. · James St. John · CC BY 2.0 · 위키미디어 공용

나전장은 먼저 울퉁불퉁한 전복 껍데기의 바깥쪽 석회질 껍질을 그라인더와 숫돌로 갈아내고, 가장 빛깔이 맑은 안쪽 진주층만 남겨 평평한 판자개(또는 산성 용액과 수증기로 연화시켜 펴낸 섭자개)로 만든다. 이 얇은 자개 판에 빛이 닿으면 미세한 결정층 사이에서 빛의 굴절과 간섭 현상이 일어나면서, 보는 각도에 따라 푸른빛, 초록빛, 보랏빛, 분홍빛이 살아 움직이듯 교차한다.

작업 현장의 양대 기술: 곡선의 ‘주름질’과 직선의 ‘끊음질’

나전장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 기법, 즉 주름질과 끊음질로 나뉜다. 두 기법은 사용하는 도구도, 장인의 손놀림도 완전히 다르며,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역시 주름질 보유자와 끊음질 보유자를 각각 인정해 전승하고 있다.

▶ 유튜브 작업 영상
국가유산채널 (K-Heritage)
[K-ASMR] 어둠 속에서 빛을 새기는 장인 — 국가무형유산 나전장 작업 현장 전 과정 유튜브에서 작업 영상 바로보기 →

1. 실톱과 줄로 그림을 오려내는 ‘주름질’

주름질은 자개 판 위에 한지에 그린 도안을 아교로 붙인 뒤, 활처럼 휜 실톱(줄톱)과 쇠줄을 이용해 매화·모란·포도·학·봉황·산수 인물 같은 곡선 문양을 오려내는 기법이다. 똑같은 꽃잎 무늬를 수백 개 만들어야 할 때는 자개 판 5~8장을 아교로 겹쳐 붙인 뒤 한꺼번에 실톱질을 하고, 뜨거운 물에 넣어 아교를 녹여 낱장으로 분리한다. 오려낸 자개 위에 바늘이나 끝이 뾰족한 칼로 꽃잎 인맥이나 새의 깃털 결을 긁어 새기는 ‘모조(毛彫) 기법’을 더하면 검은 옻칠이 그 틈에 스며들어 세밀화 같은 입체감이 살아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2세기 고려 나전 대모 칠 국화 넝쿨 무늬 합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2세기 고려 나전 대모 칠 국화 넝쿨 무늬 합. 주름질로 오려낸 국화 꽃잎과 끊음질로 표현한 넝쿨 줄기가 결합된 고려 나전의 정수다. · Metropolitan Museum of Art · CC0 · 위키미디어 공용

2. 상사칼과 인두로 수만 번 끊어 붙이는 ‘끊음질’

끊음질은 넓게 편 자개를 ‘상사틀’에 고정하고, 머리카락이나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폭(0.5~1mm)의 긴 자개 줄인 ‘상사(상사 오리)’로 켜내는 데서 시작한다. 장인은 기물 표면에 어교(민어 부레풀)를 칠한 뒤, 왼손으로 가느다란 자개 상사를 잡고 오른손에 쥔 상사칼(끝이 둥글게 휜 전용 칼)로 1~2mm 간격마다 ‘톡, 톡, 톡’ 소리를 내며 자개를 끊어 붙인다.

▶ 유튜브 작업 영상
KultureOfficial
[나전장] 주름질과 끊음질 — 실톱으로 오리고 상사칼로 끊어 붙이는 나전 세공 비교 유튜브에서 작업 영상 바로보기 →

거북 등껍질 모양의 귀갑문(龜甲紋), 끊임없이 이어지는 만(卍) 자 완자문, 격자문, 혹은 산수화의 기암괴석 능선을 표현할 때 수만 개의 미세한 자개 토막이 장인의 상사칼 끝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배열된다. 특히 둥근 항아리나 굽은 함 뚜껑 위에서도 직선처럼 보이도록 곡률에 맞춰 자개 조각의 각도를 미세하게 틀어가며 끊어 붙이는 것은 수십 년 숙련된 끊음질 장인만이 가능한 영역이다.

나전장이 만드는 물건의 구조: 나무·삼베·흙·옻칠·자개의 다층 결합

나전칠기 장롱이나 문서함의 단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단순한 나무 상자가 아니라 목재와 직물, 광물, 천연 수지, 패각이 정교하게 맞물린 다층 복합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소장 16~17세기 조선 나전칠기 상자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소장 16~17세기 조선 나전칠기 상자. 백골 위에 삼베를 바르고 수십 차례 옻칠과 숫돌 연마를 거듭해 완성했다. · Daderot · CC0 · 위키미디어 공용
  1. 백골(白骨) 다듬기와 밑처리: 소목장이 짜 맞춘 소나무·피나무·오동나무 백골의 이음매와 나뭇결 틈새를 메우고 사포로 평활하게 다듬는다.
  2. 베바르기(삼베 착수): 나무가 습도에 따라 수축·팽창하며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백골 전체에 생칠과 쌀풀을 섞은 호칠(糊漆)로 삼베나 모시를 빈틈없이 감싸 바른다.
  3. 골회(토회) 바르기와 물숫돌 연마: 기와가루나 황토 가루(토분)에 생칠을 섞어 삼베의 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여러 차례 바르고, 완전히 굳은 뒤 물숫돌로 수평이 되도록 평평하게 갈아낸다.
  4. 어교 바르기와 인두질(자개 붙이기): 밑칠을 마친 표면에 따뜻한 민어 부레풀(어교)을 바르고 자개 조각을 얹은 뒤, 불에 달군 쇠 인두로 자개 위를 문질러 어교를 순간 응고시킨다. 그 후 뜨거운 물을 부어 자개 밖으로 삐져나온 어교를 씻어낸다.
  5. 자개박기(생칠·중칠·자개 긁기): 자개가 떨어지지 않도록 묽은 생칠을 먹인 뒤, 자개 두께만큼 검은 중칠을 여러 번 덮어 칠한다. 칠이 마르면 자개 위를 덮은 옻칠 막을 작은 칼로 긁어내거나 참숯·고운 숫돌로 갈아내어 옻칠 층 속에 박힌 자개 빛을 다시 드러낸다.
  6. 상칠과 광내기(갈기·초광·재광): 마지막 상칠을 올린 뒤 콩기름과 사슴뿔 가루(치분)를 묻혀 장인의 맨손바닥과 손가락 끝으로 수천 번 문질러 거울처럼 깊은 광택을 낸다.
▶ 유튜브 작업 영상
Hello Korea
나전칠기 제작과정 :: 자개 공예 — 어교·인두질부터 옻칠 연마와 광내기까지 유튜브에서 작업 영상 바로보기 →
호놀룰루 미술관 소장 18세기 후반 조선 나전·대모 칠기 합
호놀룰루 미술관 소장 18세기 후반 조선 나전·대모 칠기 합. 어류 부레풀(어교)과 뜨거운 인두로 자개를 밀착시키고 광내기를 거쳐 표면이 한 평면으로 이어진다. · Hiart · CC0 · 위키미디어 공용
▶ 유튜브 쇼츠 (Shorts)
YouTube Shorts · 나전칠기 공방
[Shorts] 거친 전복 껍데기의 변신 — 0.1mm 자개 가공과 나전 세공 클로즈업 유튜브에서 작업 영상 바로보기 →

천년의 빛을 오늘의 공간으로 잇는 손길

과거 나전칠기는 왕실의 의례용 함과 사대부가의 문방구, 근대에는 안방을 채우던 삼층장과 자개 밥상으로 사랑받았다. 오늘날의 나전장들은 전통 혼수함과 보석함, 찻상뿐 아니라 현대 건축 인테리어 패널, 손목시계 다이얼, 만년필, 오디오 하우징에 이르기까지 0.1mm 자개와 천연 옻칠의 무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서른 번의 옻칠과 수만 번의 상사칼질로 어둠 속에 빛을 심는 나전장의 인내는 한국 공예가 도달한 가장 치밀한 미학의 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