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장도(粧刀)는 몸에 지니는 작은 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장도가 "일상생활에 쓰기도 하고 호신·자해(自害) 및 치레의 구실도 한다"라고 적는다. 한 물건에 네 가지 쓰임이 겹쳐 있다는 서술이다. 국가유산포털도 장도를 일상생활이나 호신용 또는 장신구로 쓰인 자그마한 칼이라고 적는다. 정절의 칼이라는 설명은 이 여러 쓰임 가운데 일부가 뒤에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착용 방식도 남녀 모두에 걸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남자가 저고리고름이나 허리띠에 장도끈목의 고리를 꿰어 차고, 여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았다고 적는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남자는 옷고름이나 허리에 차고, 여자는 주머니 속에 넣거나 옷섶에 노리개와 함께 찼다고 적는다. 두 사전은 모두 장도를 남녀가 함께 쓰는 물건으로 다룬다. 같은 사전은 장도를 도자(刀子)라고도 불렀다고 적는다.

정절의 상징은 특정 시기와 함께 서술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장도는 여인의 정절을 상징하기도 하였다"라고 적는다. 다루는 범위는 기원 기록과 1498년 이후의 규제, 첨자도의 실용 기능, 형태 분류, 장도장의 제작, 일본어 위키백과 항목과의 차이까지다.

『고려사』 945년 국신물과 무령왕릉 출토 소도

소형 칼을 언제부터 지녔는지는 자료도 단정하지 않는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소형 칼을 휴대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백제 무령왕릉, 경주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천마총, 양산 부부총 등에서 소형 칼과 장식용 소도小刀가 출토되어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적는다. 시작 시점을 비워 두고 출토품으로 오래됨만 말한 서술이다. 이런 문장은 기원을 못 박는 설명과 성격이 다르다.

고려의 기록은 더 구체적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고려사』에 945년 국신물의 하나로 비수와 소도자를 후진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고 적는다. 같은 사전은 "또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1014년(현종 5)과 1045년(정종 11)에 비수의 패용을 금지한 기록이 있어 고려 전기에 국가에서 규제를 할 정도로 비수를 착용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적는다. 금지 기록이 곧 유행의 증거로 읽힌다는 설명이다. 작은 칼을 차는 일이 이미 단속 대상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기원을 설명하는 또 다른 서술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라고 적는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최남선(崔南善)이 장도를 패용하는 관습을 고려시대 원에서 전파된 몽골의 풍속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출토품을 근거로 오래됨을 말하는 서술과 원 복속 이후를 시작으로 보는 서술은 결론이 같지 않다. 어느 하나로 기원을 확정할 근거는 이 자료들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 시대 유물 서술에는 재료 이름이 이미 등장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신라 고분에서는 요패腰佩에 다는 장식용 칼이 출토되었고, 한강 유역과 무령왕릉에서는 백제의 금·은장 도가 발견되었다"라고 적는다. 허리에 다는 장식 부속으로 칼이 쓰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장식과 칼이 처음부터 붙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복 옷고름에 매달린 작은 칼집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한복 옷고름에 매달린 작은 칼집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

1498년 사치금제와 1522년 당상관 규정

은장도는 장도 가운데 은으로 만든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래서 규제 기록에서는 재료가 문제로 떠오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498년(연산군 4)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70년(현종 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라고 적는다. 금지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같은 사전이 "잘 시행되지 않아서"라고 적었으니, 금지와 현실이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규제의 이유도 함께 적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존비·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사전은 명나라에 금·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도 취해졌다고 적는다. 신분 표시와 공물 부담이라는 두 이유가 한 문장에 묶여 있다. 은이라는 재료가 장식 문제이면서 재정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규제의 대상 범위는 자료마다 다르게 적힌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1498년에는 서민에게만 장도의 사용을 금하였으나 1522년에는 당상관 외에는 장도의 사용을 금하였다고 적는다. 1498년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서인의 은장도를,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서민의 장도를 적는다. 두 서술이 같은 조치를 다르게 요약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규제 기록은 장도의 성격을 거꾸로 보여준다. 금지할 만큼 널리 쓰였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정절을 말하는 설명에는 신분이나 재료 문제가 들어 있지 않다. 반면 은장도 기록의 중심은 신분과 재료다. 두 설명이 가리키는 문제가 다르다는 점을 먼저 구분해야 한다.

첨자도의 은젓가락과 '설이 있다'라는 단서

첨자도는 젓가락이 달린 장도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그중 첨자도籤子刀는 장도 칼집에 젓가락이 달려 있어 외부에서 취식取食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은으로 만들어 음 식물 의 독성 여부를 판별하는 용도도 겸하였다"라고 적는다. 칼집이 식기를 꽂아 두는 자리까지 겸했다는 서술이다. 호신용이라는 설명만 보면 놓치기 쉬운 쓰임이다.

같은 기능을 더 조심스럽게 적은 자료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은젓가락이 달린 장도를 두고, 외부에서 식사할 때 젓가락으로 쓰고 음식 중의 독의 유무를 분별하는 도구로 쓰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고 서술한다. '설이 있다'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두 사전이 같은 기능을 서로 다른 확신으로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을 분별했다는 대목은 이 두 서술 밖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첨자도는 장도의 쓰임이 한 갈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장도粧刀는 호신護身과 장식을 겸하여 평상 복에 차는 작은 칼[小刀]이다. 도자刀子라고도 불렀다"라고 적는다. 호신과 장식이 한 물건에 겹쳐 있다는 정의다. 여기에 식사 도구라는 쓰임까지 더해지면 장도는 평상복에 딸린 생활 도구에 가까워진다.

대장간 모루 위 달궈진 강철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대장간 모루 위 달궈진 강철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임진왜란 기록과 12~13세의 장도

정절의 상징을 말할 때 자료가 드는 문헌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즉, 임진왜란 당시 항상 작은 장도를 지니고 있다가 유사시에 자결 혹은 상대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있다"라고 적는다. 이 문장에는 자결과 공격이 함께 적혀 있다. 자해만을 가리키는 설명과는 범위가 다르다. 장도가 몸을 지키는 무기로도 서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징이 붙은 시기도 함께 적힌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장도가 여인의 정절을 상징하기도 했다고 적는다. 국가유산포털은 고려시대부터 성인 남녀들이 호신용으로 지니고 다녔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사대부 양반 가문의 부녀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휴대했다고 적는다. 남녀 공용이라는 서술과 부녀자의 휴대라는 서술이 한 문장 안에 이어진다. 정절이라는 뜻이 뒤에 덧붙은 층이라고 볼 수 있다.

집안에서 장도를 건네는 관습도 기록되어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사대부가에서 12~13세가 되면 장도를 주고 법도를 가르쳤으며, 그 장도는 다시 어머니에게서 딸로 대물림되었다고 적는다. 나이와 전승이 함께 적힌 서술이다. 물건이 교육의 매개이자 집안의 유품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서술은 다른 쪽을 가리킨다. 국가유산포털은 조선 후기부터 장도가 몸단장을 하는 노리개로서 일종의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제작과정이 정교하게 발달하였다고 적는다. 정절을 말하는 서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를 가리키고, 사치품을 말하는 서술은 조선 후기를 가리킨다. 두 서술이 같은 시기를 가리킨다고 볼 근거는 이 자료들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서술끼리 시기를 맞춰 읽을 때는 이 구분을 지키는 편이 안전하다.

패도와 낭도, 갖은장식과 맞배기

장도는 차는 방식으로 먼저 갈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장도 중 차게 되어 있는 것은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넣는 것은 낭도(囊刀)라 한다"라고 적는다. 이름이 쓰임새의 차이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몸 밖에 드러내는 칼과 넣어 두는 칼이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크기도 수치로 적혀 있다. 같은 사전은 장도 가운데 큰 것은 전장 5촌에 도신 3촌, 작은 것은 전장 3촌에 도신 1.5촌 내외라고 적는다. 부녀자가 지니던 낭도는 전장 3촌에 도신 1.5촌이 보통이라고 적는다. 작은 쪽의 수치와 낭도의 수치가 같다. 손바닥 안에 드는 크기라는 점이 분류의 바탕에 있다.

장식의 복잡도도 분류의 축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칼집과 칼자루의 장식이 복잡한 것은 '갖은 장식', 단순한 것은 '맞배기'라고 하며, 맞배기는 다시 칼집과 칼자루의 형태가 일一 자형인 '평맞배기'와 을乙 자형인 '을자맞배기'로 나뉜다"라고 적는다. 장식의 양과 몸체의 굽음이 함께 이름에 들어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모장도가 네모꼴이고 모잽이장도는 여덟모라고 적는다. 단면의 모 수까지 이름으로 갈렸다는 점이 드러난다.

재료로 갈린 이름도 있다. 국가유산포털은 낙죽장도를 7마디 이상의 대나무에 선비들이 좋아하는 시문을 새긴 칼이라고 적고, 일반 은장도와 달리 선비의 칼로 알려졌다고 설명한다. 은장도와 낙죽장도가 나란히 놓인 서술이다. 분류의 축이 착용 방식, 크기, 장식, 단면, 재료로 여러 겹이라고 볼 수 있다. 은장도만을 장도의 대표로 삼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물관 유리장 속 작은 칼들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박물관 유리장 속 작은 칼들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

『경국대전』 공전의 도자장 6명과 광양의 장도장

제작 공정은 쇠를 다지는 일에서 시작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칼날이 강철을 불에 달구어 망치질과 탄철을 20여 번 거듭해 칼 모양이 되도록 다진 것이라고 적는다. 같은 사전은 장식에 쓰이는 백통이 주석 7에 이끼 3의 비율로 합금된다고 적는다. 날과 장식이 서로 다른 재료 작업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은장도의 재료가 은이고 도신은 강철이며, 도신에 일편단심이라는 글씨를 문양화하여 새기기도 하였다고 적는다.

만드는 사람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에 따르면 임금의 의복 등을 담당하였던 상의원尙衣院에 도자장刀子匠 6명이 소속되어 왕실에서 사용할 장도를 제작하였다"라고 적는다. 왕실 장도를 맡은 인원이 수로 적혀 있다. 같은 사전은 1774년에 전인 20여 명과 도자장 5, 6명이 가게를 열었다고 전하며 민간의 생산과 유통도 활발했다고 적는다. 궁과 시장 양쪽에 제작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역 이름은 국가유산포털 설명에 나온다. 국가유산포털은 장도를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장도장이라 한다고 적는다. 같은 자료는 장도가 서울을 중심으로 울산·영주·남원 등지에서 많이 만들었다고 적는다. 그리고 전라남도 광양 지방의 장도가 역사가 깊고 섬세하며 종류 또한 다양하다고 평가한다. 이 대목은 사실 서술과 평가가 한 문장에 섞여 있어, 평가 부분은 해당 자료의 견해로 읽는 편이 좋다.

조선 후기에 제작과정이 정교하게 발달하였다는 국가유산포털의 서술도 이 공정 분화와 함께 놓고 볼 수 있다. 다만 두 공예의 발전 과정을 같은 원인으로 묶을 근거는 이 자료들에 없다.

개화기 이후의 감소와 일본어 위키백과 '銀粧刀' 항목

장도의 쓰임은 줄어든 것으로 기록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개화기 이후 장도의 패용이 점차 줄어들고 서양식 손칼의 보급 등으로 장도의 이용이 줄면서 장도를 만드는 장도장의 수도 감소하였다고 적는다. 물건의 쓰임과 만드는 사람의 수가 함께 적힌 서술이다. 쓰임이 줄면 기능도 줄어든다는 설명으로 읽을 수 있다.

장도를 다른 언어로 소개한 글도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銀粧刀' 항목은 은장도를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습격당할 상황에 정조를 지키기 위한 단도(短刀)이며 16세가 되면 부모에게서 받은 은빛 또는 은제 작은 칼이라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읽는 법을 '은장도'로 적고 기원을 1400년경이라고 적는다. 남편 외의 남성에게 마음이 끌렸을 때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허벅지를 찌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는 서술도 들어 있다. 옛 은장도를 박물관에서 볼 수 있고 지금은 한국의 백화점과 기념품 매장에서도 판다는 문장도 있다. 인용한 일본어 문장은 필자가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항목은 스스로 단서를 달고 있다. 항목 머리말에는 출처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거나 불충분하며 내용에 관한 문헌이나 정보원이 필요하다는 안내가 붙어 있다. 같은 항목은 한글 '은장도'가 '銀粧道'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출처 안내가 붙은 항목의 수치와 주장은 그 자체로 사실로 확정하기 어렵다. 일본의 단도 문화 자체를 설명하는 자료는 이 글이 쓴 자료 안에 없어서, 장도와 일본 단도를 견주는 작업은 여기서 확인되지 않는다.

두 쪽의 서술을 항목별로 나란히 보면 차이가 드러난다. 착용 주체는 한국 기관 자료에서 남녀 모두이고, 일본어 위키백과 항목에서는 여성이다. 주된 기능은 한국 기관 자료에서 일상생활·호신·자해·장식이고, 일본어 위키백과 항목에서는 정조를 지키는 일이다. 나이는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이 사대부가의 12~13세를 적고, 일본어 위키백과 항목은 16세를 적는다. 원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포털에서 항목별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장도에 관한 한국 기관 자료와 일본어 위키백과 '銀粧刀' 항목의 서술 비교
항목한국 기관 자료일본어 위키백과 '銀粧刀'
착용 주체남자는 저고리고름이나 허리띠, 여자는 치마 속 허리띠나 노리개여성이 지니는 단도로 서술
주된 기능일상생활·호신·자해·치레를 겸함남성에게 습격당할 상황에서 정조를 지키는 칼
건네는 나이사대부가에서 12~13세에 주고 법도를 가르침16세에 부모에게서 받았다고 서술
기원 서술고분 출토 소도, 『고려사』 945년 기록, 원 복속 이후 시작설기원을 1400년경으로 적음
출처 표시한국학중앙연구원·국립민속박물관·국가유산청 자료항목에 출처 부족 안내가 붙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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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장도는 남녀가 함께 차던 작은 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상생활·호신·자해·치레의 구실을,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호신과 장식을 겸한 평상복의 칼을 적는다. 정절의 상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붙은 뜻으로 기록되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기록에는 자결과 공격이 함께 적혀 있다. 은장도는 재료로 갈린 이름이어서 1498년과 1670년 기록에서 신분 문제로 등장한다.

형태는 패도와 낭도, 갖은장식과 맞배기, 사모장도와 모잽이장도, 낙죽장도처럼 여러 축으로 갈린다. 제작은 『경국대전』 공전의 상의원 도자장 6명과 민간의 가게 기록으로 확인되고, 국가유산포털은 서울과 울산·영주·남원, 그리고 광양을 든다. 일본어 위키백과 '銀粧刀' 항목은 장도를 여성의 단도로만 적고 출처 부족 안내를 달고 있다. 장도를 한 가지 뜻으로 줄여 부르기 어렵다는 점이 기록을 겹쳐 읽은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