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망건은 상투를 여미는 말총 머리띠다
망건(網巾)은 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을 여미는 머리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의 망건 항목은 이 물건을 이렇게 정의한다. “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머리에 두르는 장식품.” 같은 항목은 “따라서 관모라기보다는 머리장식의 하나로서, 그 위에 정식의 관을 쓴다.”라고 덧붙인다. 망건은 그 자체로 끝나는 모자가 아니라 관을 받치는 바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유산포털(국가유산청)의 망건장 자료는 재료를 분명히 적는다. 망건은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말총으로 엮어 만든 머리띠라고 적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국립민속박물관)의 망건 항목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흐르지 않게 이마를 감쌌던 머리띠라고 적는다. 세 기록은 기능을 같은 방향으로 설명한다. 머리카락을 간추리고 그 위에 관이나 갓을 얹는 일이다.
신분은 망건에 달린 장식에서 읽혔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장 항목은 관자(貫子)가 신분과 계층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고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의 Manggeon 항목은 망건에 쓰인 금, 금속, 뼈, 뿔, 옥 같은 재료가 착용자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 주었다고 적는다. 다루는 범위는 망건의 네 부분, 관자와 풍잠, 말총과 망건장의 공정, 명나라 망건과의 관계, 1895년 단발령 뒤의 변화까지다.
당과 편자와 앞과 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적은 네 부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망건 항목은 모양을 네 조각으로 나눈다. “망건은 당 · 편자 · 앞 · 뒤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며, 앞이 높고, 옆쪽이 조금 낮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 한 문장에 망건의 쓰임이 거의 들어 있다. 앞이 높다는 말은 이마를 넓게 감싼다는 뜻으로 읽힌다. 옆이 낮다는 말은 귀 쪽에 여유를 둔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 항목은 같은 구조를 위아래 세 단으로 다시 나눈다. 아래쪽은 가는 테두리인 편자, 중간은 넓적한 앞과 뒤, 위쪽은 당줄을 넣을 코를 만드는 당이다. 국가유산포털의 설명은 각 부분이 하는 일을 더 구체적으로 적는다. 당은 윗부분을 졸라매고 편자는 아랫부분을 졸라맨다. 앞은 그물처럼 얽혀 이마를 감싸고 뒤는 뒤통수를 싸맨다.
착용 방법은 당줄에 달려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당의 고에 가는 당줄을 꼬아서, 뒤에서 머리를 졸라 상투에 잡아매고”라고 적는다. 같은 대목은 편자 끝에 든든한 당줄을 달고 편자의 귀 닿는 곳에 관자를 단다고 이어진다. 끈 하나가 머리를 조르고 상투에 묶이는 구조다. 이 설명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포털에서 직접 읽을 수 있다.
관자와 풍잠, 경국대전과 조선부가 정한 재료의 차등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장 항목은 관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관자貫子(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는 신분과 계층을 상징하는 역할도 하였다.” 관자는 당줄을 꿰는 부품이다. 동시에 보는 사람에게 지위를 알리는 표시였다고 설명된다. 작은 고리 하나가 기능과 표시를 겸했다고 볼 수 있다.
재료는 문헌에 규정으로 적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경국대전』이나 『조선부朝鮮賻』에 따르면 관자는 품계에 따라 재료에 차등을 두어 일품은 옥, 이품은 금, 삼품은 은으로 만들도록 규정되어 있다.” 옥과 금과 은이 품계에 대응한다. 관자는 장식이면서 제도의 일부였다고 읽을 수 있다.
망건 앞쪽에는 풍잠(風簪)이 붙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 항목은 관자와 함께 이마 위에 풍잠을 달아 갓이 뒤로 젖혀지지 않게 고정했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풍잠의 재료도 나눈다. 상류층은 금패와 호박과 수정과 밀화를 썼고, 서민은 뼈나 뿔이나 나무를 썼다. 국가유산포털도 계급을 표시하거나 장식하려고 관자와 풍잠을 매달기도 한다고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의 Manggeon 항목은 범위를 더 넓게 적는다. 망건에 쓰인 재료로 금, 금속, 뼈, 뿔, 옥을 들고, 그것이 착용자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 주었다고 설명한다. 이 서술과 풍잠 재료 구분을 함께 보면 지위가 한 부품에만 걸려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관자와 풍잠, 그리고 장식 재료가 함께 읽혔다.
말총과 인모, 망건장의 편자 짜기와 당 걸기
재료의 중심은 말총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망건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재료로는 말총[馬尾毛]이나 인모(人毛)를 사용하나, 인모는 일반적인 것은 아니고 해진 망건을 수리할 때 쓰인다.” 인모는 보조 재료였다고 설명된다. 영어 위키백과의 Manggeon 항목은 망건을 보통 염색한 말총을 엮어 만든다고 적는다.
공정은 세 단계로 적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장 항목은 편자 짜기, 바닥 뜨기, 당 걸기로 나눈다. 첫 단계의 수치는 구체적이다. “길이 75㎝의 말총 40가닥을 1.2㎝ 폭으로 잉아에 걸고 편자칼을 바디나 북으로 삼아 좁은 폭으로 평직의 베처럼 짠다.” 좁은 띠를 베처럼 짠다는 설명이다. 망건 제작이 직조 기술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국가유산포털은 마무리 과정을 덧붙인다. 편자짜기에서 앞과 뒤뜨기로 이어지고, 당을 건 다음 망건을 삶아 부드럽게 한다. 그 뒤 염색을 하고 조립해 완성한다고 적혀 있다. 같은 설명은 재료로 말의 꼬리털이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쓴다고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는 망건을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을 망건장이라 부른다고 적는다.
세종실록 2년 경자조의 마미망건과 동월의 조선부
조선과 명의 교류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망건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세종실록≫ 2년 경자조에 마미망건(馬尾網巾)을 명나라 사신에게 증여한 기록이 있고, 1488년(성종 19)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 朝鮮賦≫에도 조선의 망건은 모두 말총으로 만든다고 적고 있다.” 두 기록은 시차를 두고 같은 재료를 가리킨다. 말총 망건이 조선의 특징으로 적혔다는 점이 확인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장 항목은 연대를 두 번 적는다. 1420년(세종 2)과 1429년(세종 11)에 국왕이 명나라 사신들에게 조선식 말총 망건을 선물로 하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재료 쪽 흐름을 이렇게 본다. “그러므로 망건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된 뒤, 말총을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은 도리어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영어 위키백과의 Manggeon 항목도 중국 망건에 말총을 쓰는 방식이 조선에서 명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는다. 두 기록 모두 단정이 아니라 추정으로 적혀 있다.
중국 쪽 기록은 유래를 전설로 전한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網巾 항목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평복으로 나섰다가 도사의 망건을 보고 물었다고 적는다. 도사의 답은 이렇게 적혀 있다. “此曰网巾。裹以头,则万髮俱齐。” 머리를 싸면 모든 머리카락이 가지런해진다는 뜻이다. 같은 항목은 주원장이 환궁한 뒤 직업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성인 남자가 망건을 쓰도록 명했다고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의 Manggeon 항목은 조선 망건이 처음에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적는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독자적인 특징을 가진 물품으로 발전했다고 덧붙인다. 전설의 사실 여부는 이 자료들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것은 두 지역이 같은 이름의 물건을 다르게 다듬었다는 서술이다.
경국대전의 망건장과 박말남, 남경의 망건시
제작은 관청 안에도 있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장 항목은 『경국대전』을 근거로 적는다. 말총으로 망건을 만드는 망건장은 공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이 경공장으로 소속되었다. 같은 항목은 의궤에서 확인되는 숫자를 비교한다. “망건장은 1627년(인조 5) 소현세자의 국혼 때 활동한 박말남朴唜男이 유일하지만, 관자장은 총 578명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남은 장인 수가 직종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점이 드러난다.
수요는 뒤에 늘었다고 적혀 있다. 같은 항목은 18세기 후반 정조 대에 양반 수가 늘어 망건 수요가 많아졌고, 민간 수공업으로 대량 제작되었다고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의 Manggeon 항목은 지역별 평가를 적는다. 통영 망건은 섬세하고 품질이 좋았고, 서울 망건은 편자가 좋았다. 논산 망건은 뒷모습이 가장 좋았고, 황등 망건은 앞모습이 가장 좋았다고 적혀 있다.
중국 쪽 기록도 제작과 유통을 적는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網巾 항목은 망건을 만들고 파는 상인과 점포가 있어 하나의 산업을 이루었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남경(南京)에 지금도 망건시(网巾市)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적는다. 또 망건을 쓰지 않은 성인 남자는 「不文明」한 시정 유민으로 여겨졌고, 남자는 관례에서 망건을 씌우는 절차를 거쳤다고 적는다. 망건이 성인 표시로도 쓰였다고 읽을 수 있다.
1895년 단발령 뒤의 망건과 1980년 망건장 지정
쓰임의 축소는 한 문장에 적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망건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망건은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진 뒤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특수단체나 노인층 약 5,000명 정도가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집계가 아니라 알려진 정보로 적혀 있다. 머리 모양이 바뀌면 그 아래 쓰던 물건의 자리도 줄어든다고 볼 수 있다.
영어 위키백과의 Manggeon 항목은 배경을 조금 더 넓게 적는다. 두 종류의 망건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국가 주도 단발령, 그리고 서양식 머리의 확산으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고 적는다. 한 가지 요인만 적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제도와 생활 습관이 함께 적혀 있다.
제작 기술은 제도로 남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망건을 만드는 일이 1980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현재의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적는다. 국가유산포털의 망건장 자료는 지정일을 1980년 11월 17일로 적는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장 항목은 보유자 인정 과정을 적는다. 임덕수가 숨진 뒤 육지에는 망건 짜는 장인이 없어 1987년에 제주도의 이수여를 보유자로 인정했고, 이수여가 숨지자 2009년에 그의 딸 강전향을 보유자로 인정해 기술을 전승하고 있다.
조선 망건과 중국 망건, 기록에 적힌 차이 항목별 대조
두 지역의 망건은 이름이 같고 모양이 다르다. 첫째는 형태다. 영어 위키백과의 Manggeon 항목은 중국 망건이 모자처럼 머리 위를 덮었다고 적는다. 반면 조선 망건은 양 끝에 끈이 달린 둥근 머리띠라고 적는다. 국가유산포털의 설명에서도 조선 망건의 앞은 이마를 감싸고 뒤는 뒤통수를 싸맨다.
둘째는 고정 방식이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網巾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通常使用 丝网 编成,以 帛 作边,内引以小 绳 ,穿过两侧耳边的小环(名曰 贯子 ),并在脑后以及 发髻 处扎结固定。” 실그물로 엮고 비단으로 테두리를 두르며, 귀 옆의 작은 고리에 끈을 통과시켜 뒤통수와 상투에서 묶는다는 설명이다. 조선 망건은 당의 고에 당줄을 꼬아 뒤에서 머리를 졸라 상투에 잡아맸다. 셋째는 재료다. 동월의 『조선부』는 조선의 망건이 모두 말총으로 만든다고 적었고, 영어 위키백과는 망건을 보통 염색한 말총으로 엮는다고 적는다.
넷째는 보급 경로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網巾 항목은 조선이 명의 의관제도를 참조해 전국에 망건을 보급했다고 적는다. 다섯째는 나수망(懒收网)이다. 같은 항목은 이마 부분만 여미고 상투는 묶지 않는 형식이 뒤에 나왔으며, 조선의 나수망은 당시 중국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고 적는다. 여섯째는 유물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망건 항목은 능창대군 이전(1599~1615)의 무덤에서 나온 망건으로 중국식 망건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기능을 이렇게 정리한다. “망건은 망처럼 짜 이마에 둘러 머리를 간추리는 데 사용한 머리띠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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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망건은 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을 여미는 말총 머리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망건을 관모라기보다 머리장식의 하나로 적고, 그 위에 정식의 관을 쓴다고 설명한다. 신분은 망건에 달린 관자와 풍잠, 그리고 장식 재료에서 읽혔다. 『경국대전』과 『조선부』는 관자의 재료를 일품 옥, 이품 금, 삼품 은으로 규정했다.
제작은 편자 짜기와 바닥 뜨기, 당 걸기의 세 단계로 적혀 있다. 명나라 망건과의 관계는 두 방향으로 기록된다. 조선 망건이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서술과, 말총 사용법이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으로 여겨진다는 서술이다. 1895년 단발령 뒤 수요는 급격히 줄었고, 망건 제작은 1980년 11월 17일 지정으로 남았다. 전설의 사실 여부나 사라진 시점의 세부는 이 자료들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