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삼국유사 권1 도화녀비형랑조

도깨비 이야기를 문헌에서 찾으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도화녀비형랑조가 먼저 나온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이 이야기를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도깨비 본풀이라고 적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비슷하게 적는다. 이 사전은 삼국유사의 비형설화(鼻荊說話)를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도깨비 이야기로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신라 제25대 진지왕과 관련된 것으로 삼국유사 권1에 실려 전한다. 비형은 저녁마다 도깨비들을 모아 놀았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이야기 뒤에 남은 풍속도 함께 전한다. 사람들은 비형을 두고 지은 글을 써 붙여 잡귀를 물리쳤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도화녀비형랑 항목은 경주의 풍속을 이렇게 적는다. "경주의 풍속에서는 지금도 '성제(聖帝)의 혼이 아들을 낳은 비형랑의 집'이라는 가사를 문에 붙여서 귀신을 쫓는데, 이것이 '동경두두리'의 시초라고 한다." 다리를 놓는 행위와 문에 붙이는 글이 한 조목에 같이 남았다.

두 사전의 서술을 종합하면, 이 기록을 도깨비 신앙의 초기 기록으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다. 먼저 비형이 도깨비를 부려 다리를 놓는 초인적 행위가 적혀 있다. 그다음 비형의 이름을 적어 문에 붙이는 신앙 행위가 적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여러 문헌 기록을 볼 때 삼국시대에 이미 도깨비신앙이 있었다고 추측한다. 이야기와 신앙이 한자리에 남은 점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기이편 머릿말이 밝힌 수록 이유

삼국유사 기이편 머릿말은 먼저 선을 긋는다. 머릿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릇 옛 성인(聖人)이 바야흐로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시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다음 머릿말은 논지를 돌린다. 중국 고대의 탄생담을 선례로 열거한다. "간적(簡狄)은 알을 삼키고 설(契)을 낳았으며 강원(姜嫄)은 발자국을 밟고 기(弃)를 낳았다."

그리고 머릿말은 이렇게 묻는다.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편집 방침도 한 문장으로 밝힌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기적이 모든 편(篇)의 첫머리에 실린 것은 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문장들은 위키문헌의 번역 삼국유사 권제1에서 직접 읽을 수 있다. 다만 머릿말이 도화녀비형랑조를 직접 가리켰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새벽 물길 위의 낮은 돌다리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새벽 물길 위의 낮은 돌다리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

도화녀와 진지왕, 7일 동안 머문 왕과 비형의 출생

이야기의 앞부분은 왕과 한 여인의 일로 시작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 대목을 이렇게 정리한다. 신라 제25대 진지왕은 왕위에서 추방되기 전에 유부녀인 도화랑을 범하려 했다. 그러나 왕은 그녀의 지조를 꺾지 못하고 도화랑을 돌려보냈다. 도화랑은 남편이 없으면 왕의 요구를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10여 일 뒤에 죽은 왕이 나타났다. 왕은 도화랑의 방으로 들어가 전날의 그 말을 내세웠다. 그리고 7일 동안 머물고 갔다. 달이 차서 도화랑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이름이 비형이다.

진평왕은 그 신기함을 듣고 비형을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 비형은 15세에 집사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 뒤 비형은 저녁마다 궁궐 밖으로 나가 도깨비들을 모아 놓고 놀았다. 여기까지가 비형의 출생과 벼슬에 관한 기록이다.

하룻밤에 놓은 귀교와 경주의 두두리 섬김

진평왕은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도깨비를 부려 일을 하게 하였다. 귀교(鬼橋)도 하룻밤 사이에 놓게 하였다. 또 길달(吉達)이라는 도깨비를 끌어 국정을 돕게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비형이 도깨비의 두목으로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큰 다리를 놓았다고 적는다. 국립민속박물관 항목도 비형이 무리를 부려 하룻밤 새 다리를 놓고 이름을 귀교라 불렀다고 적는다.

국립민속박물관 항목은 이 행위의 성격도 설명한다. 비형이 두두리도깨비들을 부려 다리를 놓고 성문을 세운 점을 건축신의 직능으로 본다. 그리고 그 행위가 구술전승에서 도깨비가 하는 대표적인 행위와 일치한다고 적는다.

이야기 뒤의 자취는 경주의 기록에 남았다. 도깨비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 달아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경주부의 기록은 국립민속박물관 항목에 인용되어 있다. 신라 경주의 사람들이 비형 이후 두두리(豆豆里) 섬기기를 심히 성히 했다는 내용이다. 같은 항목은 그 비형랑을 도깨비로 본다. 고려사(高麗史) 이의민 조에는 경주 사람들이 두두을(豆豆乙)이라 부르는 목매(木魅)가 있고, 이의민이 당을 세워 그를 집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한옥 대문에 붙은 흰 종이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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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헌과 중국 문헌을 나란히 놓고 보기

한국 문헌은 도깨비의 이름과 성격을 여러 갈래로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도채비·독각귀(獨脚鬼)·허주(虛主)·망량(魍魎)과 제주도의 영감 같은 이름을 든다. 같은 사전은 도깨비가 사람이 죽은 뒤 영혼이 변해서 되는 귀신과 다르다고 적는다. 도깨비는 나무와 돌 같은 자연물이 변해서 되고 산과 들에서 흔히 나타난다. 장계이(張繼弛)의 해동잡록(海東雜錄)은 도깨비를 산과 바다의 음령(陰靈)한 기운이며 풀·나무·흙·돌의 정기가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적는다. 제주도에서는 도깨비가 집안의 수호신과 어선의 선신, 대장간의 신, 마을의 당신으로 모셔졌다.

중국 문헌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포박자(抱朴子)에는 도깨비가 발이 하나밖에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기록을 들어 발이 하나라는 이야기가 고대부터 동양에 널리 퍼진 것으로 본다. 또 같은 사전은 시애설화가 중국의 수신기(搜神記)와 법원주림(法苑珠林)에도 기재되었다고 적는다. 그래서 도화녀비형랑과의 관련성이 주목된다고 적는다.

두 쪽의 기록을 항목별로 놓으면 차이가 보인다. 이름을 보면 한국 문헌에는 비형과 두두리, 두두을이 나온다. 등장 문헌을 보면 한국은 삼국유사 권1과 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려사 이의민 조, 해동잡록이다. 중국은 포박자와 수신기, 법원주림이다. 내용을 보면 한국 문헌은 다리를 놓는 일과 문에 붙이는 글, 목매를 집에 모시는 일을 적는다. 포박자는 발이 하나라는 특징을 적고, 수신기와 법원주림은 시애설화를 적는다.

정리

도깨비 이야기의 첫 문헌 기록은 삼국유사 권1 도화녀비형랑조로 정리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이 이야기를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도깨비 본풀이로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비형설화를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도깨비 이야기로 적는다. 같은 사전은 여러 문헌 기록을 볼 때 삼국시대에 이미 도깨비신앙이 있었다고 추측한다. 두 사전의 설명이 이 조목에 대한 평가를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설화 유형으로 보면 분류가 여러 겹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이야기를 이물교구설화(異物交媾說話) 중 사자교혼(死者交婚)에 속한다고 본다. 또 장덕순(張德順)이 시도한 시애설화(屍愛說話) 범주의 두 번째가 이 설화류를 지칭한다고 적는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이 설화가 야래자(夜來子)설화와 이물교혼설화, 시애설화와 상호 관련이 있다고 적는다. 원문은 위키문헌의 번역 삼국유사 권제1과 두 사전의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밤의 성벽 바깥 빈 흙길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밤의 성벽 바깥 빈 흙길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