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투호(投壺)는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투호 항목은 이 놀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투호(投壺)는 성인 남녀가 정월에 항아리[壺]를 일정한 거리에 놓고 화살 던지기를 통해 승부를 겨루는 인공 도구 놀이이다.” 정의에 들어 있는 두 낱말이 중요하다. 하나는 “성인 남녀”이고, 다른 하나는 “정월”이다. 아이들 놀이로도, 아무 때나 하는 놀이로도 적혀 있지 않다.

유래는 중국 예법으로 전한다. 중국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은 “投壺來源於射禮”라고 적는다. 투호가 활쏘기 예법에서 왔다는 뜻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투호 항목은 투호를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적는다. 같은 사전은 성종이 투호를 두고 “투호는 희롱하고 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기구라.” 일렀다고 전한다.

놀이의 자리는 궁궐과 양반 집안이었다. 조선 기록에는 왕실 행사로 제정된 의례도 남아 있다. 뒤에는 일반 놀이로 퍼지면서 예법이 간소화되었다고 적힌 기록도 있다. 다루는 범위는 도구와 점수 규칙, 조선 왕실 기록, 세시 놀이로의 변화, 중국과 일본 기록의 차이다.

『예기』와 『춘추좌전』에 남은 투호

투호의 바탕은 활쏘기 예법이라고 중국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이 적는다. 같은 항목은 활쏘기를 대신하게 된 사정을 세 가지로 적는다. 첫째는 마당이 넓지 않아 과녁을 세우기 어려운 사정이다. 둘째는 손님이 많아 활과 짝을 갖추기 어려운 사정이다. 셋째는 활을 잘 쏘지 못하는 손님이 있는 사정이다. 그래서 화살과 항아리로 활과 과녁을 대신해 손님을 즐겁게 하고 예의를 익혔다고 적혀 있다.

투호는 오래된 놀이로 적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투호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투호投壺는 궁궐과 양반 집안에서 주로 행해지던 놀이로 『예기禮記』에 투호법이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전통놀이이다.” 『예기』에 투호법이 실려 있다는 서술이다. 같은 사전의 투호 서술은 투호가 중국 한나라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적는다. 또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진나라 제후와 제나라 제후가 술을 마시는 가운데 투호를 한 것으로 확인된다고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 Pitch-pot 항목은 투호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생겨났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궁수나 병사들이 한가할 때 하던 소일거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덧붙인다. 이 대목은 추정으로 적혀 있어, 단정으로 읽지 않는 편이 낫다. 같은 항목은 규칙과 의례가 복잡했다고 적는다. 주인과 손님이 세 번 양보한 뒤에야 놀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서술이다. 중국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에도 같은 절차가 적혀 있다.

중국어 쪽 구절은 이렇다. “投壺遊戲的禮節繁瑣,投壺之前,主客之間要請讓三次才能進行。” 투호의 예절이 번거로워 시작 전에 주인과 손님이 세 번 청하고 양보해야 했다는 뜻이다. 던지기보다 자리를 여는 절차가 길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투호의 뜻을 활쏘기와 나란히 놓는다. “활쏘기가 덕을 함양하는 수단으로 권장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호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이 문장은 투호를 승부보다 몸가짐의 도구로 놓는다.

마당에 놓인 귀 달린 투호 항아리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마당에 놓인 귀 달린 투호 항아리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

『고려사』와 예종 1116년의 투호 교범

한국에서 투호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중국 사서로 설명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투호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 『주서(周書)』, 『북사(北史)』, 『수서(隨書)』 등의 기록에 의하면 투호는 고구려와 백제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이 놀이가 삼국시대에 이미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네 종의 사서가 함께 제시되어 있다. 투호가 고구려와 백제에 있었다는 서술이 근거로 놓인다. 신라에 관한 언급은 이 문장에 나오지 않는다.

고려 기록은 『고려사(高麗史)』로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시대에 투호가 주로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 궁중 오락으로 즐겨졌다고 적는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예종 때 송나라에서 투호의 도구를 보내온 일을 적는다. 같은 사전은 보문각 학사들에게 투호의례와 그림을 그려 투호를 권장하기 시작하였다고 덧붙인다. 도구와 함께 의례와 그림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연대가 적힌 기록도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투호 항목은 고려 예종 때(1116년)의 기록을 이렇게 옮긴다. “그간 투호가 중단되었는데 장차 투호를 할 것이니 그림을 곁들인 교범을 편찬하라 명하고 있어” 투호가 한동안 중단되어 있었다는 서술이 앞에 놓인다. 다시 하려면 교범이 필요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림을 곁들인 교범이라는 형태도 함께 적혀 있다.

조선 기록은 쓰임의 자리를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선시대에 투호가 왕실과 조정 고관들의 여흥에 행해졌다고 적는다. 경로연(敬老宴)과 손님 접대 같은 사교 자리도 함께 들어 있다. 놀이가 잔치의 절차 안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마광 『투호격범』의 투호병 치수

투호 도구를 적은 책으로 『투호격범(投壺格範)』이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투호 항목은 이 책을 이렇게 다룬다. “사마광(司馬光)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투호의 놀이 기구에 대한 설명과 놀이 방법이 쓰여 있지만, 오늘날 그 놀이 기구나 놀이 방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책 이름과 저자는 전하지만 내용은 자세히 확인되지 않는다는 서술이다. 투호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할 지점이 여기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투호격범』의 치수를 좀 더 적는다. “투호 병은 입지름이 3치[寸]이고, 귀[耳]의 입지름은 1치이며 높이는 1자[尺]이다. 병 속은 팥으로 채운다.” 입지름은 3치이고 귀는 1치다. 귀가 입구보다 좁게 적혀 있다. 귀를 맞히기가 더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병 속을 팥으로 채운다는 대목도 함께 적혀 있다.

같은 사전은 거리와 살의 수도 적는다. 병은 던지는 이가 앉은 자리에서 2살 반쯤 되는 거리에 놓는다. 살은 12개를 쓴다. 실수하지 않고 병에 꽂힌 것을 상(上)으로 삼는다. 먼저 120을 채우는 쪽이 이긴다고 되어 있다. 같은 사전의 다른 서술은 넓은 마당의 잔디밭이나 대청에 귀 달린 항아리를 놓고, 사람들이 동서로 편을 갈라 10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던진다고 적는다.

항아리 치수는 기록마다 다르게 적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다른 서술은 투호병 입구의 지름을 5치·4치·2치로 적고, 귀의 크기나 종류도 여러 가지라고 덧붙인다. 살은 청살과 홍살 두 가지로 겨룬다고 적혀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은 배 길이 5치, 목 길이 7치, 전체 높이 1자 2치, 입지름 2치 반인 항아리를 적는다. 투호 항목의 원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온라인판에서 직접 읽을 수 있다. 하나의 표준 치수를 말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대청에 놓인 청살과 홍살 열두 개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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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호신격』의 점수와 불승의 벌주

일본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은 『투호신격(投壺新格)』의 규정을 전한다. 항아리는 높이 1자, 입지름 3치다. 양옆에는 지름 1치의 귀라고 불리는 구멍이 두 개 있다. 화살은 길이 2자 4치로 12개를 쓴다. 던지는 자리는 화살 길이의 2.5배인 6자 거리다. 앞에서 본 『투호격범』과 이름이 다른 책이며, 두 이름이 같은 책인지는 이 자료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점수 규정은 비교적 또렷하다. 첫 화살이 성공하면 10점이다. 귀에 들어가면 20점이다. 두 번째부터 연속으로 성공하면 하나당 5점이다. 12개를 모두 넣으면 그 자리에서 승리한다. 그 밖에는 합계가 먼저 120점에 이른 쪽이 이긴다.

이 규정에서 귀의 값은 입구의 두 배다. 좁은 구멍에 더 높은 값을 매긴 셈으로 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같은 구조를 짧게 적는다. 화살을 항아리 속이나 귀에 던져 넣고, 꽂히는 수에 따라 득점이 정해진다는 서술이다. 연속 성공에 점수를 주는 방식은 한 번의 운보다 이어지는 솜씨를 재는 쪽으로 볼 수 있다.

벌칙도 규칙의 일부였다. 영어 위키백과 Pitch-pot 항목은 화살이 들어가지 않을 때마다 패자인 불승(不承)이 술을 마셔야 했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내기를 막기 위해 패자가 벌주 대신 노래를 택할 수도 있었다고 덧붙인다. 중국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은 네 발을 던진 뒤 사회자가 총점을 계산해 승부를 알렸다고 적는다. 벌주는 감례인(監禮人)이 선언했다. 승부는 삼국 이승제로 가렸고, 감례인이 승자를 알린 뒤 모두 축배를 들었다고 적혀 있다.

성종의 투호의와 중종 1518년 기록

조선 왕실은 투호를 의례로 정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투호 항목은 성종(成宗) 10년에 투호의(投壺儀)를 제정하고 권장하였다고 적는다. 같은 사전은 투호가 궁중행사의 하나로 관례화되어 갔다고 적는다. 또 매년 3월 3일이나 9월 9일에 기로연과 기영회에서 투호를 시행하게 하였다고 적는다. 놀이가 날짜와 자리를 가진 행사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성종의 말도 전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성종이 투호를 두고 이렇게 일렀다고 적는다. “투호는 희롱하고 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기구라.” 이 문장은 투호를 놀이와 몸가짐 사이에 놓는다. 투호를 옹호할 때 쓰인 말투로 볼 수 있다.

상을 내린 기록도 있다. 같은 사전은 1482년(성종 13) 3월 11일에 성종이 정승들에게 옛사람은 투호로 마음을 바르게 잡았다고 말했다고 적는다. 장원자에게는 망아지 한 마리를 주었다. 나머지에게는 활 1틀씩을 주었다. 상으로 활을 준 대목은 투호와 활쏘기가 가까이 놓였음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중종 때 기록도 남아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중종조 기사를 이렇게 옮긴다. “종친 가운데 활을 못 쏘는 자는 투호를 시켰고, 세자도 투호를 즐겼다.” 활을 못 쏘는 사람에게 투호를 시켰다는 대목은 활쏘기와의 관계를 다시 보여 준다. 영어 위키백과 Pitch-pot 항목은 15세기에 조선 왕실이 궁중에서 투호를 되살렸고, 투호를 유교의 산물로 내세웠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1518년에 중종이 비판에서 투호를 옹호하며 그 품격과 유교적 의미를 재확인했다고 적는다.

열 걸음 뒤에서 항아리를 보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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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원권 지폐에 오른 투호

투호를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투호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중에서 성행하였고, 양반들의 놀이였다.” 같은 항목은 놀이할 때 예를 갖추었다고 덧붙인다. 일반 백성은 놀이 도구를 마련하는 일이며 절차가 복잡하여 하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 도구와 절차가 함께 문턱으로 적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뒤에는 모습이 달라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경우에 따라 돈과 물품을 거는 내기의 형태가 되기도 하였다고 적는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변화를 이렇게 적는다. “일반 놀이로 대중화되면서 투호가 담고 있는 유교적인 예법은 거의 간소화되거나 사라졌다.” 세 번 청하고 양보하던 절차가 남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같은 놀이가 다른 자리에서 다른 규칙으로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세시 놀이로서의 자리도 기록에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투호를 성인 남녀가 정월에 하는 놀이로 정의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3월 3일과 9월 9일의 기로연과 기영회를 적는다. 정월과 삼월 삼일, 구월 구일이 함께 등장한다. 한 해의 특정한 날과 함께 적힌 놀이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기록에도 투호가 남아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투호를 천 원 권 지폐에 실릴 정도로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적는다. 영어 위키백과 Pitch-pot 항목은 투호가 1983년부터 2002년까지 천 원권 지폐에 실렸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2007년 1월 22일 처음 발행된 새 천 원권에서는 투호가 제외되었다고 적는다. 지폐에 실렸던 기간과 빠진 시점이 함께 확인된다.

중국 한대의 개량과 일본 다나카 고난의 투호

중국에서 투호는 오래 이어졌다. 영어 위키백과 Pitch-pot 항목은 투호가 처음에 상층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투호가 다른 계층으로 퍼졌고 청나라 말까지 중국에서 인기를 유지했다고 적는다. 도구의 변화도 기록돼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은 한대의 투호 방법이 춘추전국시대보다 크게 개선되었다고 적는다.

그 대목은 이렇게 적혀 있다. “原來的投壺是在壺中裝滿紅小豆,使投入的箭桿不會躍出” 원래는 항아리 속을 팥으로 채워 들어간 화살대가 튀어나오지 않게 했다는 뜻이다. 앞에서 본 『투호격범』의 “병 속은 팥으로 채운다”와 같은 방식이 여기 적혀 있다. 한대에는 팥을 채우지 않고 대나무 화살로 바꾸어 화살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고 같은 항목이 적는다. 항아리 속을 채우는지 여부가 놀이의 성격을 갈랐다고 볼 수 있다.

점수 규정도 손질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은 사마광 이전에 항아리 위에 화살이 올라앉았을 때 보너스 점수가 있었다고 적는다. 같은 항목은 『투호신격』에서 이 보너스 점수를 폐지했다고 적는다. 점수 항목이 줄어든 손질로 볼 수 있고, 폐지한 까닭은 이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같은 항목은 “日本ではあまり投壺は行われなかった。”라고 적어, 일본에서는 투호가 그다지 행해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 에도시대에 유학이 성해지면서 투호에 주의를 두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적는다.

일본 쪽 기록은 한 사람의 이름을 남긴다. 일본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은 18세기 후반에 학자 다나카 고난(田中江南)이 일본식으로 손본 투호가 행해진 일이 있다고 적고, 그것이 오래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중국어 위키백과 投壺 항목은 『일본의 놀이』에 항아리 종류만 38종 이상 기록돼 있다고 적는다. 두 서술의 방향은 서로 달라, 어느 쪽이 실제에 가까운지는 이 자료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세 갈래 기록의 차이를 항목별로 적으면 이렇다. 유래는 중국어 위키백과가 활쏘기 예법을 적고, 영어 위키백과가 춘추전국시대의 발생을 적는다. 항아리는 『투호격범』이 입지름 3치, 중국어 위키백과가 입지름 2치 반,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다른 서술이 5치·4치·2치로 적는다. 승부는 『투호격범』과 『투호신격』이 120점 선도달로, 중국어 위키백과가 삼국 이승제로 적는다. 벌칙은 영어 위키백과가 불승의 벌주와 노래를, 중국어 위키백과가 감례인의 벌주 선언을 적는다. 전승은 중국에서 청나라 말까지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그다지 행해지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기록에 따라 다르게 적힌 투호 도구와 승부 방식
기록항아리화살승부와 거리
『투호격범』(한국민속대백과사전)입지름 3치, 귀 입지름 1치, 높이 1자, 속은 팥으로 채움살 12개앉은 자리에서 2살 반 거리, 먼저 120을 채우면 승
『투호신격』(일본어 위키백과)높이 1자, 입지름 3치, 양옆에 지름 1치 귀 구멍길이 2자 4치 화살 12개화살 길이의 2.5배인 6자 거리, 120점 선도달 또는 12개 전부 성공
중국어 위키백과 投壺배 길이 5치, 목 길이 7치, 전체 높이 1자 2치, 입지름 2치 반확인되지 않는다네 발을 던진 뒤 총점 계산, 삼국 이승제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다른 서술입구 지름 5치·4치·2치, 귀의 크기와 종류 여러 가지청살과 홍살 2가지동서로 편을 갈라 10걸음 정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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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투호는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다. 기록은 이 놀이의 뿌리를 활쏘기 예법에 둔다. 조선에서는 궁궐과 양반 집안의 놀이로 행해졌고, 성종 10년에는 투호의가 제정되었다. 성종의 말은 투호를 마음을 다스리는 기구로 적는다. 놀이와 예법이 한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도구와 점수는 기록마다 다르다. 『투호격범』은 입지름 3치 병과 2살 반 거리를 적고, 『투호신격』은 첫 화살 10점과 귀 20점을 적는다. 두 이름이 같은 책인지는 이 자료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일반 놀이로 대중화되면서 유교적인 예법은 거의 간소화되거나 사라졌다고 적혀 있다. 투호를 볼 때는 어느 기록의 투호인지 먼저 확인하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