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cm의 작은 활이 145m 과녁을 꿰뚫는 비밀
한국의 전통 활터(국궁장)에 서면 사대(射臺)에서 과녁까지의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 거리는 무려 145m(120보)로, 축구장 길이보다도 훨씬 멀다. 그런데 궁사들이 손에 쥔 전통 활 ‘각궁(角弓)’의 길이는 고작 120~130cm 남짓에 불과하다. 시위를 풀어 놓으면 어른 팔뚝만 한 동그란 고리(C자 모양)처럼 말려 있던 이 작은 활을 반대 방향으로 힘껏 꺾어 시위를 걸고 대나무 화살(죽시)을 당겨 놓으면, 화살은 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145m 밖 과녁에 ‘딱!’ 하는 파열음과 함께 꽂힌다.
이 놀라운 탄성과 직진성을 만들어내는 장인이 바로 국가무형유산 제47호 궁시장(弓矢匠)이다. 궁시장은 활을 만드는 궁장(弓匠)과 화살을 만드는 시장(矢匠)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으로, 두 장인 모두 자연에서 얻은 동·식물 재료를 불과 어교(부레풀), 그리고 수만 번의 손길로 다스려 한 조의 활과 화살을 완성한다.
제1부 — 궁장(弓匠)의 공방: 7가지 천연 재료와 사계절이 빚는 복합궁 ‘각궁’
서양의 롱보우(Longbow)나 일본의 화궁(和弓)이 주로 나무나 대나무 단일 소재의 길이를 늘려 탄성을 얻는 것과 달리, 한국의 각궁은 성질이 서로 다른 7가지 천연 재료를 층층이 결합한 만곡 복합궁(Reflex Composite Bow)이다.
각궁을 이루는 7가지 재료의 역학적 분담
- 대나무(왕대): 활의 가운데 심재(뼈대)가 되어 기본 탄성을 만든다.
- 뽕나무(상목): 활의 양 끝단 휘어지는 부분(고자)에 쐐기 모양(V자 연소걸이)으로 이어 붙여 시위의 충격을 견딘다.
- 참나무: 사수의 손이 쥐는 가운데 줌통에 덧대어 활의 중심이 뒤틀리지 않도록 잡아준다.
- 물소뿔(수우각): 활의 안쪽 배(압축면)에 붙여, 활을 당길 때 엄청난 압축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튕겨내는 폭발적인 복원력을 낸다.
- 소힘줄(우근): 활의 바깥쪽 등(인장면)에 수십 겹 붙여, 활을 극한까지 당겨도 부러지지 않고 당겨주는 인장력을 발휘한다.
- 민어 부레풀(어교): 못이나 화학 본드 없이 나무·대나무·물소뿔·소힘줄을 한 몸처럼 결속시키는 천연 단백질 접착제다.
- 자작나무 껍질(화피): 소힘줄과 부레풀이 습기에 약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활 겉면 전체를 감싸는 천연 방수 외피다.
궁장의 핵심 작업: 밧줄로 감는 ‘각부’와 빗질하듯 올리는 ‘심놓기’
궁장의 작업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물소뿔을 붙이는 ‘각부(角附)’와 소힘줄을 올리는 ‘심놓기(근부·筋附)’다. 궁장은 먼저 불에 구워 곡선을 잡은 대나무 심재와 뽕나무 고자를 접합한 뒤, 평평하게 깎은 물소뿔 안쪽에 뜨거운 민어 부레풀을 바르고 긴 밧줄(조승)과 나무 막대(조산)를 이용해 온몸의 체중을 실어 빈틈없이 칭칭 감아 압착한다.
그다음 소의 등 힘줄을 말려 나무 방망이로 수천 번 두드려 하얀 명주실처럼 잘게 찢어 놓는다. 찬 바람이 부는 늦가을과 겨울, 궁장은 따뜻한 부레풀에 적신 소힘줄 다발을 활의 등 쪽에 올려놓고, 대나무 빗처럼 생긴 ‘심빗’과 뜨거운 ‘심인두’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듯 한 올의 엉킴도 없이 펴 바른다. 이 심놓기 과정을 열흘 간격으로 초심·재심·삼심 등 열 차례 이상 거듭한 뒤,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점화장(건조실)’에서 한 달 넘게 숙성시킨다.
마지막으로 둥글게 말려 있는 활을 조심스럽게 펴서 불을 쬐어가며 좌우 대칭과 장력을 맞추는 ‘해궁(解弓)’을 거치면, 제작 시작 후 꼬박 1년 만에 한 장의 각궁이 세상에 나온다.
제2부 — 시장(矢匠)의 공방: 숯불과 조대로 휜 대나무를 일직선으로 펴는 ‘죽시’
아무리 명품 각궁이라도 화살이 똑바로 날아가지 못하면 145m 밖의 과녁을 맞힐 수 없다. 시장(矢匠)이 만드는 전통 대나무 화살 ‘죽시(竹矢)’는 무게가 약 7~8돈(26~30g)에 불과하지만, 총 130여 단계의 세밀한 수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시장의 작업대 위에서 벌어지는 불의 연금술: 절잡이와 화잡이
- 해장죽 선별과 껍질 벗기기(영내기): 겨울철 남해안과 동해안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 조직이 치밀한 2년생 해장죽(시누대)을 베어 말린 뒤, 칼로 겉껍질을 얇게 깎아낸다.
- 숯불 화로와 ‘조대’로 대나무 펴기(절잡이·화잡이): 자연 그대로의 대나무는 마디마다 구불구불 휘어 있다. 시장은 작은 숯불 화로 위에 대나무 마디를 골고루 쬐어 대나무 속 수분과 섬유질을 부드럽게 달군 뒤, 구멍이나 홈이 파인 단단한 나무 도구인 ‘조대’에 끼워 한쪽 눈을 감고 직선도를 확인하며 지렛대처럼 꺾어 일직선으로 바로잡는다.
- 싸리나무 오늬와 쇠촉 결합: 시위가 걸리는 화살 끝부분(오늬)은 대나무가 쪼개지지 않도록 질기고 단단한 싸리나무를 깎아 끼우고, 어교로 접합한 뒤 그 위를 붉은 복숭아나무 껍질(도피)과 소힘줄로 감싸 보강한다. 앞끝에는 원뿔형 쇠촉을 끼운다.
- 꿩 날개깃 붙이기(깃간 맞추기): 화살이 날아갈 때 회전하며 방향을 잡아주는 날개깃은 야생 수꿩의 날개깃을 최고로 친다. 오른쪽 날개깃으로 만들면 오른쪽깃만, 왼쪽 날개깃으로 만들면 왼쪽깃만 3장을 120도 간격으로 정확히 붙여야 화살이 공중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회전(스핀)하며 흔들림 없이 직진한다.
궁장과 시장의 호흡이 만나는 145m의 포물선
궁장이 1년 동안 사계절의 온도와 습도를 견디며 빚어낸 각궁과, 시장이 숯불 앞에서 수백 번 눈대중으로 곧게 펴낸 죽시는 사수의 손끝에서 비로소 하나가 된다. 못 하나, 합성수지 한 방울 없이 오직 자연의 뿔과 힘줄, 대나무, 부레풀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탄성 효율을 구현한 궁시장의 기술은 한국 전통 공예가 지닌 첨단 재료공학의 결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