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대비의 궁에서 창경원을 거쳐 다시 궁궐로
창경궁은 성종이 세 대비를 모시려고 넓힌 궁이다. 이 궁은 일제강점기에 창경원이 되었다가 1983년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그 사이 1762년에는 영조가 세자를 폐한 일이 있었다. 여러 자료는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은 곳을 창경궁 문정전으로 소개한다. 이 글은 7부작 가운데 3부다.
창경궁의 연혁은 네 개의 연도로 줄일 수 있다. 1418년 수강궁, 1483년 창경궁, 1911년 창경원, 1983년 이름 회복이다. 이 연도들은 한 궁궐이 왕실 공간과 놀이 공간 사이를 오간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궁에는 두 시기의 흔적이 함께 남아 있다.
궁능유적본부 기록으로 본 1418년 수강궁과 1483년 창경궁
창경궁 자리에는 원래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에 따르면 1418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이 궁을 세웠다. 그다음 1483년(성종 14)에 성종이 수강궁을 크게 넓혔다. 성종은 세 대비를 모시려 했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했다. 세 대비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다.
먼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지어졌다. 그다음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고, 4년 뒤 다시 지어졌다.
창건 연도는 자료마다 조금 다르다.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483년을 적는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성종 15년(1484)에 안순왕후를 모시려 수강궁을 수리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적는다. 어느 연도를 따르든, 이 궁이 대비를 모시는 공간으로 출발했다는 점은 자료들이 같다. 다른 궁궐의 연혁과 견주려면 연재 1부의 경복궁 연혁과 나란히 읽어 볼 수 있다.
영조실록 1762년 윤5월 13일 기사와 문정전
영조실록의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기사는 이날 일을 적고 있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해 서인(庶人)으로 삼고 안에 엄히 가두었다. 세자는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임금을 맞이했다. 그다음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은 세자에게 관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며 자결을 재촉했다.
같은 날 기사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이 기사의 번역문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누리집에서 읽을 수 있다.
이 구절은 왕의 명령 내용을 실록이 남기지 않았다고 기록 스스로 밝힌 대목으로 읽을 수 있다. 장소와 결말은 다른 자료가 전한다. 국가기록원은 문정전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소개한다.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와 코리아중앙데일리(Korea JoongAng Daily)는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8일 뒤 숨졌다고 적는다. 인용한 실록 구절에는 휘령전이 나오며, 휘령전과 문정전의 관계는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 차이는 실록의 전각 이름과 오늘의 안내 이름을 구별해 읽어야 함을 보여 준다.
1911년 창경원과 1924년 밤 벚꽃놀이, 1909년 대온실
20세기 초 창경궁은 궁궐이 아닌 공원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907년부터 건물 대부분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했다고 적는다. 코리아중앙데일리는 1909년 일제가 궁 일부를 헐고 동물원·식물원·박물관을 지었다고 쓴다. 1911년에는 이름이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다. 한자는 궁능유적본부가 昌慶苑,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昌慶園으로 적는다. 국가기록원은 전각과 담장 60여 채가 철거되거나 변형되었다고 전한다.
주간경향에 따르면 벚나무가 자란 1918년부터 창경원은 벚꽃 명소가 되었다. 1924년 벚꽃철부터는 해마다 밤에도 문을 열었다. 코리아중앙데일리는 1924년 4월 한 주 동안 15만 명이 찾았다고 적는다. 국가기록원은 1971년 4월 주말 하루 평균 25만 명이 입장했고, 1972년 벚꽃놀이 기간 미아가 918명이었다고 전한다. 이 숫자들은 이 궁이 오랫동안 궁궐보다 유원지로 기억되었음을 보여 준다.
대온실도 이 시기에 지어졌다. 국가유산청은 1909년에 지은 대온실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소개한다. 구조는 철골과 목조를 섞었고, 겉면은 유리로 둘렀다. 면적은 582.3㎡, 높이는 10.5m다. 코리아헤럴드(The Korea Herald)는 신주쿠 어원 책임자 후쿠바 하야토의 설계로 프랑스 회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대온실은 창경원 시기의 시설이 오늘까지 남은 사례로 읽을 수 있다.
1983년 이름 회복과 1986년 복원정비, 오늘의 관람 동선
1983년 창경궁은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같은 해 문화재관리국이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궁능유적본부는 그 뒤 동물원을 옮기고 본래 궁궐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적는다. 국가기록원은 복원정비작업이 1986년 8월 23일에 끝났다고 전한다. 대온실은 철거되지 않았고, 2004년 등록문화재 제83호가 되었다. 코리아헤럴드는 2017년 11월에 대온실이 15개월 정비를 마치고 다시 열렸다고 보도했다.
관람은 정문 홍화문에서 시작한다. 홍화문을 지나면 옥류천 위 옥천교를 건너 명정문과 회랑에 닿는다. 궁능유적본부에 따르면 창경궁은 남향인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쪽을 향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명정전·명정문·홍화문을 현존 궁궐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축으로 꼽는다. 코리아타임스는 문정전이 남쪽을 향하며 1986년 문정문과 함께 복원되었다고 쓴다.
이 동선을 따르면 앞서 본 두 시기를 한 번에 지나게 된다. 홍화문과 명정문은 오래된 건물로, 문정전은 1986년 복원 건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이 구별은 같은 궁 안에서도 건물마다 지나온 시간이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준다.
| 연도 | 사건 | 근거 기관 |
|---|---|---|
| 1418년 |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 창건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
| 1483년(국가기록원은 1484년) | 성종이 세 대비를 위해 수강궁을 넓히고 창경궁으로 이름 지음 | 궁능유적본부·국가기록원 |
| 1762년 | 영조가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삼음(윤5월 13일)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 1911년 | 이름이 창경원으로 격하됨 | 궁능유적본부·한국민족문화대백과 |
| 1983년 | 창경궁 이름 회복, 문화재관리국 복원 계획 발표 | 궁능유적본부·국가기록원 |
| 1986년 | 복원정비작업 마침(8월 23일) | 국가기록원 |
정리
창경궁의 연도는 자료마다 엇갈리는 곳이 있다. 항목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창건은 궁능유적본부가 1483년, 국가기록원이 1484년으로 적는다. 동물원 설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1907년부터, 코리아중앙데일리가 1909년으로 적는다. 대온실 건립은 국가유산청이 1909년, 코리아헤럴드가 1907년으로 적는다. 이 차이는 연도 하나를 외우기보다 어느 기관의 기록인지 함께 보아야 함을 보여 준다.
실록 기사에 등장하는 휘령전과 오늘 현장에서 안내하는 문정전처럼 문헌의 전각 이름과 현재의 관람 동선을 나란히 대조해 볼 수 있다. 현장에서는 문정전 앞마당과 대온실을 함께 보며 두 시기의 거리를 느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