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도성 서쪽의 이궁, 일제강점기에 궁역이 줄었다
경희궁(慶熙宮)은 도성 서쪽에 있어서 서궐(西闕)로 불린 조선의 이궁(離宮)이다. 지금 궁터가 작은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역이 파괴되어 줄었기 때문이다. 이 궁은 광해군 대에 지어졌다.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이 글은 7부작 가운데 5부다.
궁의 원래 넓이는 자료마다 단위가 다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7만여 평으로 적는다.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의 영문 자료는 약 231,000㎡로 적는다. 서울특별시는 1987년부터 복원사업을 벌였다.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경희궁을 관리한다. 오늘 보는 경희궁은 옛 궁의 일부를 되살린 모습으로 볼 수 있다.
1617년 경덕궁 창건과 1760년 경희궁 개칭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1617년(광해군 9)에 광해군이 경덕궁을 세웠다고 적는다. 계기는 원종(元宗)의 잠저(潛邸)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술사의 말이었다. 원종은 인조의 생부다. 국가유산청 영문 자료는 창건 해를 1616년(광해군 8)으로 적는다. 같은 자료는 1760년(영조 36)에 이름이 경희궁으로 바뀌었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창건 때 건물은 1,500칸에 이르렀다. 정전·동궁·침전·제별당·나인입주처 등이 여기에 들었다. 서궐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의 경희궁 소개 글에 나온다. 그 글은 “경덕궁이 지어지면서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 불렸다.”라고 적는다.
창건 연도가 두 기관에서 한 해 다르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 차이는 연도를 옮길 때 어느 기관의 자료인지 함께 밝혀야 함을 보여 준다. 서궐이라는 이름은 도성 안의 자리를 기준으로 붙은 이름으로 읽을 수 있다.
1829년 화재에서 1926년 숭정전 이전까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829년(순조 29)에 큰불이 났다. 이 불로 회상전(會祥殿)·융복전(隆福殿)·흥정당(興政堂) 등 주요 전각의 절반가량이 탔다. 그다음 1865년(고종 2)에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는 이때 대부분의 전각이 경복궁 복원에 쓰였다고 적는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뜰의 전석(磚石)과 층계석을 뽑아 광화문 중건에 썼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07년에 궁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다고 적는다. 1910년에는 궁이 국유로 편입되었다. 1915년에는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세워졌다. 같은 사전의 경희궁지 항목은 1907년에 기존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었다고 적는다.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우는 등 지형도 크게 바뀌었다. 국가유산청 영문 자료는 1907~1910년의 강제 철거로 궁이 궁궐의 지위를 잃었다고 적는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에 조계사로 옮겨졌다. 동국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숭정전은 1976년 동국대학교로 옮겨져 법당으로 쓰인다. 1977년 2월에는 정각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각원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다. 이 기록은 원래의 정전 건물과 궁터에 다시 세운 숭정전을 구별하게 해 준다. 또 궁이 여러 시기에 걸쳐 모습을 잃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흥화문의 이동 경로와 1985년 이후 발굴·복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정문 흥화문은 1618년에 세운 건물이다. 이 문은 창건 때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 1932년에 일제는 이 문을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가져다 썼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이 해를 1931년으로 적는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지은 절이고, 문의 이름은 경춘문으로 바뀌었다. 해방 뒤 신라호텔이 들어서자 이 문은 호텔 정문으로 쓰였다.
흥화문은 경희궁복원계획에 따라 궁으로 돌아왔다. 원래 자리에는 구세군회관이 있었다. 그래서 문은 서쪽으로 100여m 옮긴 곳, 본디 개양문(開陽門)이 있던 자리에 섰다. 돌아온 해는 같은 사전의 경희궁 항목이 1988년, 경희궁지 항목이 1987년으로 적는다. 현판 글씨가 밤에도 빛나 경희궁이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흥화문의 경로는 문 하나의 연도도 자료마다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서울특별시는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사적공원 조성계획」에 따라 1985년부터 7차례 발굴조사를 했다. 목적은 숭정전과 숭정문, 동서남북 회랑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다음 1991년에 숭정전, 1998년에 자정전과 회랑, 2000년에 태령전 일곽이 복원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영문 안내는 2002년부터 시민에게 개방했다고 적는다. 이 복원 과정은 같은 연재의 창경궁 이야기와 나란히 읽을 수 있다.
영조가 자주 머문 궁, 숭정전·태령전·서암을 따라 걷기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명의 왕이 이 궁에 머물렀다. 숙종은 회상전에서 태어나 13년을 이곳에 머물렀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부터 자주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했다. 같은 자료는 “두 왕 모두 경희궁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숙종은 융복전(隆福殿)에서, 영조는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였다.”라고 적는다. 영조가 자주 머물기 시작한 해와 궁 이름이 바뀐 해는 모두 1760년이다. 두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이 겹침이 드러난다.
서울역사박물관 안내에 따르면 1744년(영조 20)에 태령전을 고쳐 영조의 어진을 모셨다. 영조가 승하한 뒤 태령전은 혼전으로도 쓰였다. 숭정전에서는 경종·정조·헌종 세 임금이 즉위식을 치렀다. 서암은 본래 왕암(王巖)으로 불렸고, 그 이름 때문에 광해군이 궁을 지었다는 속설이 전한다. 1708년(숙종 34)에 숙종은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瑞巖’ 두 글자를 직접 써서 새기게 했다. 왕암 이야기는 박물관 안내문도 속설로 소개한다는 점을 구별해 둘 만하다.
관람은 흥화문,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순으로 돌면 복원된 차례를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금천교는 1619년(광해군 11)에 세워졌으나 일제가 묻었다. 서울특별시는 2001년 발굴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금천교를 복원했다. 국가유산청 영문 자료에 따르면 궁터 북쪽에는 길이 약 100m의 석축이 있고, 돌계단에 용머리와 구름무늬 조각이 있다. 전각의 처마를 올려다볼 때는 궁궐 단청 글을 함께 읽어도 좋다. 원문은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역사박물관 누리집에서 읽을 수 있다.
| 연도 | 사건 | 근거 기관 |
|---|---|---|
| 1617년(광해군 9) | 광해군이 경덕궁을 세움 | 국사편찬위원회 |
| 1760년(영조 36) |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개칭 |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 |
| 1865년(고종 2) | 경복궁 중건에 대부분의 전각이 쓰임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
| 1907년 | 궁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섬 | 한국학중앙연구원 |
| 1915년 |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세워짐 | 한국학중앙연구원 |
| 1987년 | 서울특별시가 복원사업을 시작함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
정리
경희궁의 연혁은 창건, 개칭, 화재, 이건, 철거, 복원이 한 장소에 겹친 기록이다. 궁터의 숭정전과 흥화문은 같은 복원 시기에 섰지만 이력이 서로 다르다. 숭정전의 원래 건물은 동국대학교에 있다. 흥화문은 원래 건물이 여러 곳을 거쳐 궁으로 돌아왔다.
남은 질문도 있다. 창건 연도와 흥화문 이전 연도는 기관마다 한 해씩 다르게 적혀 있다. 현장에서는 북쪽 석축, 서암, 금천교처럼 전각이 아닌 돌 구조물도 눈여겨볼 만하다. 원문을 읽을 때는 같은 사건에 기관마다 어떤 연도를 쓰는지 함께 살펴보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