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 임진왜란 뒤 가장 먼저 다시 지어져 법궁 역할을 맡았다
창덕궁(昌德宮)은 임진왜란 뒤 궁궐 가운데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다. 그다음 창덕궁은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 년 동안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이 내용은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의 창덕궁 소개에 나온다. 이 글은 7부작 가운데 2부다.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궁능유적본부는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룬 배치를 평가의 이유로 든다. 궁궐 북쪽에는 후원이 조성되었다. 낙선재 권역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이 생활한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1404) 10월 6일 기사와 1405년 창건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의 태종 4년(1404) 10월 6일 기사에 창건의 출발점이 나온다. 이 기사에서 태종은 송도(松都)에 있을 때 수재와 한재가 여러 번 있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태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기사에 따르면 태종은 종묘에서 동전을 던지는 척전으로 도읍 후보지의 길흉을 점쳤다. 결과는 신도(한양)가 2길 1흉이었다.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 1길이었다.
같은 기사는 결정을 이렇게 기록한다. "다시 한양(漢陽) 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드디어 향교동(鄕校洞) 에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였다." 기사에는 향교동 동쪽 가의 터를 살펴 이궁을 짓게 했다는 대목도 있다. 독자는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웹사이트에서 이 기사 원문을 직접 읽을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창덕궁은 착공 1년 만인 1405년 10월에 낙성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0월 25일에 '창덕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적는다. 당시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태종이 경복궁에서 있었던 정치적 사건을 꺼린 이유가 컸다고 설명한다. 같은 사전은 이 일이 두 궁궐을 함께 운영하는 양궐체제의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법궁 경복궁의 연혁은 1부에서 다룬 경복궁의 창건과 중건 과정에 정리되어 있다.
1592년 소실, 1610년 재건, 1867년까지 약 270여 년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창덕궁은 조선 전기 187년 동안 이궁 역할을 했다. 그다음 창덕궁은 임진왜란 초기에 방화로 소실되었다. 궁능유적본부는 창덕궁이 1610년(광해군 2)에 궁궐 가운데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먼저 복구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그전까지 임금들이 주로 거처한 곳이 창덕궁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경복궁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재건 시점은 자료마다 적는 단계가 다르다. 항목별로 나란히 놓으면 다음과 같다. 궁능유적본부는 1610년(광해군 2)을 재건 연도로 적는다. 우리역사넷은 1608년 10월에 1차 공사가 끝나 중요 전각이 대체로 조성되었다고 적는다. 두 연도가 각각 어떤 단계를 가리키는지는 이 자료들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중건 약 10년 뒤인 1623년 인조반정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그때 외전 일부만 남았다. 창덕궁은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우리역사넷은 1833년 화재로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에 탔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마지막 대화재가 1917년 11월에 일어났다고 적는다. 그 복구공사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을 옮겨 지어 주요 부분을 채웠다.
1997년 세계유산 등재와 1406년 조성된 후원
궁능유적본부는 창덕궁이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대신 창덕궁은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어졌다. 궁능유적본부는 그래서 창덕궁이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적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제21차 회의(CONF.208)에서 등재를 결정했다. 결정문은 등재기준 (ii)·(iii)·(iv)를 근거로 든다. 결정문은 건물이 지형에 맞추고 자생 수목을 유지하며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룬 방식을 뛰어나다고 평가했다(필자 번역).
궁능유적본부 영문 소개는 창덕궁이 '동궐(Donggwol)'로 불렸다고 적는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창덕궁은 창경궁과 경계 없이 이어져 있었다. 후원은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처음 조성되었다. 후원은 1463년(세조 9)에 확장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인조는 후원 경영에 몰두했다. 인조는 재위 14년(1636)부터 25년(1647)까지 정자를 짓고 원림을 조성했다. 궁능유적본부는 인조부터 순조 대까지 옥류천·규장각·주합루·애련지·의두합·연경당 등이 지어졌다고 적는다.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어제와 어필 등을 보관하려고 지은 2층 건물이다. 주합루 1층에는 규장각을 두었다. 연경당은 1828년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진연 장소로 쓰려고 창건되었다.
1847년 낙선재와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
궁능유적본부 영문 소개에 따르면 1847년(헌종 13) 낙선재 권역이 조성되었다. 이로써 궁궐 영역이 더 넓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낙선재를 1847년에 중건된 사대부 주택 형식의 궁궐 건물로 설명한다. 같은 사전에 따르면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운 건물이었다. 낙선재는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했지만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대신과 외국 공사를 접견했다. 우리역사넷은 순종이 1907년부터 1928년까지 창덕궁에 거처했다고 적는다. 궁능유적본부는 순종이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적는다. 대조전의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된 장소다.
궁능유적본부는 낙선재 권역을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이 광복 이후 생활하다 세상을 떠난 곳으로 소개한다. 그 가족은 순정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영친왕 이은은 1963년부터 1970년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이방자 여사는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이곳에 기거했다.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는 덕혜옹주가 1962년 50세에 귀국했다고 전한다. 같은 기사는 덕혜옹주가 1989년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 연도 | 사건 | 근거 기관 |
|---|---|---|
| 1405년(태종 5) |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 10월 낙성 | 궁능유적본부·우리역사넷 |
| 1592년(선조 25) | 임진왜란으로 소실 | 궁능유적본부 |
| 1610년(광해군 2) | 궁궐 중 처음 재건(1차 공사 완료는 1608년 10월로 기록) | 궁능유적본부·우리역사넷 |
| 1647년 | 인조반정 소실 뒤 25년 만에 복구 | 한국학중앙연구원 |
| 1847년(헌종 13) | 낙선재 권역 조성 | 궁능유적본부·한국학중앙연구원 |
| 1997년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제21차 회의 CONF.208) | 궁능유적본부·세계유산위원회 |
정리
창덕궁의 연혁은 1405년 창건, 1592년 소실, 1610년 재건, 1997년 세계유산 등재로 요약된다. 궁능유적본부는 역대 왕들이 1867년까지 약 270여 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실록과 공식 기록을 함께 읽으면 이궁에서 실질적인 법궁으로 바뀐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 나온 건물 가운데 현재와 관련된 정보도 있다. 우리역사넷은 현재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광해군 때 재건된 돈화문이라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인정전을 조정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이 열린 정전으로 설명한다. 다만 각 전각의 현재 개방 범위와 관람 순서는 이 글의 근거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방문 전에는 궁능유적본부의 안내를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