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 왕이 자란 집이 '궁'이 되었다

운현궁은 경복궁 같은 궁궐이 아니다.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하면서 왕의 본궁이 되어 '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운현궁을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설명한다. 고종은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글은 7부작 가운데 6부다.

한국관광공사는 운현궁을 왕족의 친족이 살던 궁으로 소개한다. 그래도 운현궁은 평범한 사가와 달랐다. 경향신문 영문판은 운현궁이 일반 양반가에서 보기 드문 규모를 갖췄다고 쓴다. 같은 기사는 노안당과 노락당으로 이어지는 배치가 궁궐에 견줄 격식을 보여 준다고 평가한다. 운현궁은 '궁'이라는 이름과 사가의 성격을 함께 지닌 곳으로 볼 수 있다.

’雲峴宮’ 현판이 걸린 운현궁 정문과 열린 나무 대문, 매표소
서울 종로구 운현궁의 정문(2013년) · me · Public domain · 위키미디어 공용

1863년 작호 교지에서 1991년 서울특별시 매입까지 — 운현궁 연혁

운현궁이 자리한 종로구 운니동 일대는 옛 관상감(觀象監) 터였다. 관상감은 천문을 관측하던 기관이다. 『고종실록』 고종 즉위년 12월조에는 대왕대비가 철종의 후사를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정한 기사가 있다. 서울특별시는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이는 작호 교지가 1863년 12월 9일에 내려졌다고 밝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흥선군의 사저가 이때부터 운현궁으로 불렸다고 적는다.

『고종실록』 고종 1년 1월조에는 호조가 대원군 궁 수축 재원을 지출하겠다고 보고한 기사가 있다. 이 두 실록 기사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누리집에 실려 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확장된 운현궁의 담장이 수 리(數里)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흥선대원군은 1873년 고종이 친정 의사를 밝힐 때까지 섭정했다. 운현궁은 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1년에는 후손이 양도 의사를 밝혀 서울특별시가 운현궁을 매입했다.

이 연혁은 운현궁이라는 이름이 작호 교지와 함께 붙었음을 보여 준다. 집의 이름이 집주인의 신분 변화를 따라 바뀌었다고 읽을 수 있다. 1991년에야 소유권이 후손에게서 서울특별시로 넘어간 점도 궁궐과 다른 사가의 내력을 보여 준다.

금관조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전신 초상화
금관조복 차림의 흥선대원군 초상(1869년) · Yi Hancheol and Yu Sook · Public domain · 위키미디어 공용

『승정원일기』 1864년 기록 — 어로의 문 현판과 준공 축하

『승정원일기』 고종 1년(1864) 9월 1일 기사에는 고종의 하교가 실려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 대목을 이렇게 옮긴다. “운현궁의 새로 세운 어로(御路)에 외문은 경근문, 내문은 공근문으로 현판을 써 붙이도록 호조에 분부하라.”

이 하교에 따라 운현궁 어로의 바깥문은 경근문, 안쪽 문은 공근문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24일 『승정원일기』 기록도 운현궁의 준공을 다룬다. 서울특별시 미디어허브에 따르면 근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 과거시험을 보게 했다. 그리고 선비 50여 명과 소년 497명을 뽑아 시상했다.

두 기록은 왕명이 한 사가의 문 이름과 준공 행사까지 다루었음을 보여 준다. 호조가 실무를 맡은 점에서 운현궁이 보통 사가와 다른 대우를 받았다고 읽을 수 있다. '궁'이라는 이름이 호칭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전시실 진열대에 펼쳐진 『승정원일기』 책과 한자 표지가 보이는 책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전시된 『승정원일기』(2013년) · Salamander724 · Public domain · 위키미디어 공용

1866년 가례와 1869년 이로당 — 사가가 별궁이 되다

1866년 고종의 혼례가 결정되었다. 조대비(신정왕후)는 운현궁을 별궁(別宮)으로 지정했다. 그때까지는 어의궁(於義宮)이 별궁으로 쓰였다. 초간택에서 5명이 뽑혀 재간택에 나갔다. 재간택은 2월 29일 중희당에서 열렸고, 민치록의 딸이 최종 낙점되었다. 고종 3년인 1866년 3월 21일, 운현궁에서 가례가 열렸다.

서울특별시 미디어허브는 당시 혼례 모습을 82쪽 분량의 채색 친영 반차도(班次圖)로 확인할 수 있다고 소개한다. 가례는 운현궁 건물의 쓰임도 바꾸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원래 노락당이 안채였다. 노락당에서 가례를 치른 뒤로는 이곳을 안채로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1869년(고종 6) 이로당을 새로 지어 안채로 삼았다.

별궁 지정은 이전까지 쓰던 어의궁 대신 왕의 사가가 선택된 일로 읽을 수 있다. 안채를 옮긴 일은 왕실 의례 한 번이 집의 공간 구분을 바꿀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운현궁에서는 사가와 궁궐의 경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노안당·노락당·이로당과 양관 — 오늘 운현궁에서 볼 곳

한국관광공사는 대표 건물로 1864년 9월에 준공한 노안당과 노락당을 꼽는다. 같은 자료는 이로당을 그로부터 6년 뒤의 증축으로 소개한다. 앞서 본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이로당 신축을 1869년으로 적는다. 두 자료는 이로당의 시기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는다. 연혁을 정리할 때는 어느 기관의 표기인지 함께 밝히는 편이 낫다고 볼 수 있다.

정문 우측에는 수직사가 있다.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맡은 사람들이 머물던 건물이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사랑채다. 흥선대원군이 임종한 곳도 노안당 안의 방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로당을 흥선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뒤 말년을 보낸 곳으로 소개한다. 당시 넷이던 대문은 지금 하나만 남아 있다.

양관은 1912년 무렵 일본인이 황실 인사를 회유하려고 지은 건물이다. 설계는 일본인 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가 맡았다. 양관은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안에 있어 관람이 주로 외관으로 제한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을 8,000점 넘게 소장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자료는 『통조수지』를 운현궁의 재정을 기록한 회계장부로 소개한다. 사랑채·안채·경비 공간으로 나뉜 쓰임은 운현궁을 사가의 공간 구성으로 읽게 해 준다.

운현궁 연혁을 연도 순으로 정리한 표
연도사건근거 기관
1863년 12월 9일흥선대원군·부대부인 작호 교지가 내려지고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기 시작함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특별시
1864년 9월노안당·노락당 준공, 9월 1일 어로의 외문·내문 현판 하교한국관광공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66년 3월 21일고종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올림서울특별시 미디어허브
1869년이로당을 새로 지어 안채로 삼음국사편찬위원회
1977년사적으로 지정됨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년후손의 양도 의사에 따라 서울특별시가 매입함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
’老安堂’ 현판이 걸린 운현궁 노안당 건물과 돌계단 기단
서울 운현궁 노안당(2026년) · Sadopaul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 유튜브 작업 영상
KBS 히스토리
KBS 역사추리 – 운현궁 솟을대문 뒤집혀 달린 까닭은? / KBS 19960503 방송 유튜브에서 작업 영상 바로보기 →

정리

운현궁의 기록에는 왕실 행정과 한 집안의 생활이 겹쳐 있다. 어로의 문 현판, 준공 축하 시험, 별궁 지정은 왕실 쪽 기록이다. 사랑채에서의 임종과 이로당에서 보낸 말년은 집주인의 생애에 속한다. 이 두 갈래를 나누어 읽으면 '궁'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더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남은 질문도 있다. 이로당의 시기를 한국관광공사와 국사편찬위원회가 다르게 적는 이유는 각 자료의 원문에서 더 살펴볼 일이다. 노안당과 노락당의 배치가 궁궐에 견줄 격식을 보인다는 평가도 현장에서 따져 볼 만하다. 82쪽 친영 반차도와 『통조수지』 같은 기록물은 건물 밖에서 운현궁을 읽는 또 다른 길이다.

기와지붕을 얹은 운현궁 양관 정문과 닫힌 나무 대문
서울 운현궁 양관의 정문(2026년) · Sadopaul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