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아홉 번의 손끝을 거쳐 백 번째 사람에게 닿는 ‘백지(百紙)’
찬 서리가 내린 겨울 아침, 경남 의령과 전북 전주, 경기 가평의 전통 한지 공방에서는 차가운 물이 담긴 커다란 나무 수조 ‘지통(紙桶)’ 앞에 장인이 서 있다. 국가무형유산 제117호 한지장(韓紙匠)이 천장에 매단 한 줄의 끈에 의지해 대나무 초지발을 얹은 ‘외발틀’을 물속에 넣었다가 앞뒤로 한 번, 좌우로 한 번 물을 스치듯 흘려 보내면(‘철썩, 촤르르’), 뽀얀 닥나무 섬유가 얇은 막처럼 대나무 발 위에 내려앉는다. 장인의 손목 스냅 하나로 종이의 두께가 0.05mm 단위까지 결정되는 순간이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전통 한지를 ‘백지(百紙)’라 불렀다. 단순히 빛깔이 희다는 뜻(白紙)만이 아니라, 닥나무를 베는 순간부터 완성될 때까지 장인의 손길이 아흔아홉 번(99번) 닿고, 그 종이를 펼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백 번째(100번)로 만져야 비로소 한지가 완성된다는 경외심이 담긴 이름이다.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8세기 통일신라)과 조선왕조실록이 천 년 넘게 바스러지지 않고 살아남은 비결이 바로 한지장의 이 아흔아홉 번의 공정 속에 숨어 있다.
제1~3공정 — 겨울 참닥나무, 천연 잿물, 그리고 돌판 위의 닥방망이질
천 년 가는 한지는 재료 준비부터 서양의 목재 펄프 종이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1. 닥무지와 백피(白皮) 만들기
한지장은 찬 바람이 부는 11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 섬유질이 가장 단단하게 여문 1년생 참닥나무 가지를 벤다. 큰 가마솥에 닥나무 단을 세워 넣고 수증기로 푹 쪄내는 ‘닥무지’를 거치면 껍질이 쏙 벗겨진다. 이 껍질(피닥)을 물에 불려 검은 겉껍질과 초록빛 속껍질을 칼(닥칼)로 일일이 긁어내면, 가장 질기고 하얀 안쪽 인피 섬유인 ‘백피(白皮)’만 남는다.
2. 화학 약품 대신 메밀대·콩대 ‘천연 잿물’로 삶기
현대의 양지(서양 종이)는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와 염소 표백제로 목재 펄프를 녹이기 때문에 셀룰로오스 사슬이 끊어지고 산성화되어 50~100년이 지나면 누렇게 부스러진다. 반면 한지장은 메밀짚, 콩대, 목화대, 밤나무를 태운 재에 뜨거운 물을 부어 걸러낸 천연 약알칼리성 잿물(pH 9~10)에 백피를 넣고 가마솥에서 서너 시간 푹 삶아낸다. 이렇게 하면 닥섬유의 세포벽을 전혀 다치지 않게 하면서 섬유 사이의 불순물(리그닌과 펙틴)만 부드럽게 녹아 빠져나와, 완성된 한지가 pH 7~8의 약알칼리·중성을 유지하게 된다.
3. 칼날로 자르지 않고 돌판 위에서 두드리는 ‘고해(叩解)’
삶아낸 백피를 맑은 시냇물에 헹군 뒤 일광 표백하고 티끌을 골라낸 다음, 한지장은 화강암 넓적한 돌판(닥돌) 위에 백피를 올려놓고 참나무 닥방망이로 수천 번 내리쳐 으깬다. 기계 칼날로 섬유를 토막 내는 서양 제지법과 달리, 방망이로 두드려 패는 고해(두드리기) 방식은 5~12mm에 달하는 닥나무의 긴 인피 섬유를 끊지 않은 채 미세한 잔가지(피브릴)가 일어나도록 부드럽게 풀어준다. 이 긴 섬유들이 서로 깍지를 끼듯 얽히기에 한지는 가죽처럼 질긴 인열 강도를 갖게 된다.
제4공정 — 황촉규 ‘닥풀’과 한국 고유의 ‘외발뜨기(흘림뜨기)’ 물질
곱게 두드린 닥섬유를 차가운 물이 담긴 지통에 풀고, 여기에 황촉규(닥풀) 뿌리를 차가운 물에 담가 우려낸 천연 식물성 점액을 섞는다.
닥풀 점액은 두 가지 결정적인 마법을 부린다. 첫째, 긴 닥섬유가 물속에서 서로 뭉치거나 바닥에 가라앉지 않고 고르게 떠 있도록 붙잡아 준다. 둘째, 물이 빠지는 속도를 적절히 늦춰 장인이 발틀 위에서 물결을 조종할 시간을 벌어주며, 젖은 종이 수백 장을 겹쳐 쌓아도 서로 달라붙지 않고 한 장씩 깨끗하게 떨어지게 해준다. (더운 여름에는 이 천연 닥풀 점액이 금세 묽어져 풀리기 때문에, 최고 품질의 전통 한지는 찬물이 얼음장 같은 겨울철에 뜬 ‘세주지(歲籌紙·겨울 한지)’를 으뜸으로 친다.)
왜 ‘외발뜨기’ 한지는 사방 어느 쪽으로도 찢어지지 않는가?
한지장의 물질 기법인 ‘외발뜨기(흘림뜨기)’는 세계 제지사에서도 독보적인 기술이다. 틀에 물을 가두어 흔드는 쌍발뜨기와 달리, 외발뜨기는 천장에 매단 한 줄의 끈에 발틀 한쪽만 걸고, 먼저 앞쪽에서 물을 퍼 담아 반대편으로 세차게 흘려보내며(앞물질) 섬유가 세로 방향으로 깔리게 한다. 그 직후 다시 옆쪽에서 물을 떠서 좌우로 흔들어 반대쪽 옆으로 흘려보내며(옆물질) 섬유가 가로 방향으로 깔리게 한다.
앞물질로 뜬 한 장과 옆물질로 뜬 한 장을 포개어 한 장의 한지로 합치면(합지), 종이 내부의 긴 닥섬유들이 우물 정(井) 자 격자 구조로 치밀하게 교차 결합한다. 이 덕분에 전통 한지는 가로 방향(폭)과 세로 방향(길이)의 강도 차이가 거의 없어, 노끈으로 꼬아 지승 공예품을 만들거나 갑옷(지갑·紙甲)을 만들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
제5공정 — 디딜방아로 종이의 숨결을 다지는 ‘도침(搗砧)’
물질을 마친 젖은 종이 더미(배지) 위에 무거운 돌을 얹어 밤새 물기를 뺀 뒤, 한 장씩 떼어내어 건조판에 솔로 쓸어 말린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국 한지를 세계 최고의 명품 종이로 완성하는 마지막 화룡점정이 바로 ‘도침(搗砧)’ 공정이다.
한지장은 다 마른 종이 수백 장을 겹쳐 쌓으면서 사이사이에 묽은 쌀미음(쌀풀)을 아주 엷게 축여 촉촉하게 만든 뒤, 커다란 디딜방아 모양의 도침기(다듬이 방아) 아래에 넣고 수백 번 쿵쾅거리며 내리친다. 이 도침을 거치면 닥섬유 사이의 미세한 빈틈이 조밀하게 메워지면서 종이 표면의 보풀이 사라지고, 마치 다듬이질한 비단처럼 매끄러운 광택과 탄력이 살아난다. 먹물이 번지지 않고 발색이 깊어 당나라와 송나라, 명·청대의 문인들이 그토록 구하고자 했던 ‘고려지(高麗紙)’의 비결이 바로 이 외발뜨기와 도침에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과 바티칸이 선택한 천년의 종이
오늘날 한지장이 뜬 전통 한지는 국내 고문서 복원을 넘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중세 문화재 복원, 이탈리아 바티칸 박물관과 국립기록유산연구소의 다빈치·성프란치스코 친필 기록물 복원 용지로 공식 채택되어 세계 문화유산을 되살리고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잿물과 찬물, 그리고 장인의 아흔아홉 번 손길이 빚어낸 한지 한 장은 지금도 천년의 시간을 향해 조용히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