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1995년에 함께 등재된 돌의 석굴과 사찰

석굴암과 불국사는 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국가유산청은 석굴암의 가치로 본존불의 모델, 천원지방 구조, 황금비 설계를 든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불국사를 돌과 나무가 어우러진 고대 불교건축으로 평가한다. 이 글은 17부작 가운데 1부다.

두 유산은 같은 창건 기록을 공유한다. 『삼국유사』는 재상 김대성이 두 곳을 함께 짓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연재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한 묶음으로 보는 데서 시작한다. 한국의 다른 세계유산은 다음 편들에서 차례로 다룬다.

1995년 등재 목록, 국보 제24호 석굴암과 사적 및 명승 제1호 불국사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등재 대상은 두 곳이다. 석굴암은 국보 제24호다. 불국사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다. 국가유산포털은 석굴암을 인공 석굴로 설명한다. 360여 개의 돌을 짜 맞춰 내부를 만들고 바깥을 흙으로 덮었다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석굴암을 돌을 쌓는 조적식(造積式) 석굴로 부른다.

석굴암의 공간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직사각형의 전실이 있다. 그다음 통로인 비도(扉道)가 이어진다. 끝에는 본존불이 있는 원형의 주실이 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본존불 주위에 불상 38구가 있다고 설명한다. 영문 일간지 코리아중앙데일리(Korea JoongAng Daily)는 둘레 벽에 상 39구가 새겨져 있다고 적는다.

두 자료의 숫자는 서로 다르다. 이 차이는 자료마다 무엇을 셌는지 따져 읽어야 함을 보여 준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불국사가 석조 구조물과 목조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곳이라고 평가한다. 석굴암은 돌로 감싼 내부 공간이다. 불국사는 돌과 나무로 세운 지상 건축이다. 한 등재 안에 서로 다른 두 건축 방식이 함께 묶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국사 대웅전 영역으로 오르는 돌계단 청운교와 백운교를 정면에서 본 모습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2024년) · Basile Morin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국가유산청 설명, 『대당서역기』의 황금불과 천원지방, 12당척

국가유산포털은 본존불을 석가모니불이라고 설명한다. 본존불은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나타낸다. 국가유산청은 본존불을 항마촉지인 불좌상의 가장 우수한 예로 꼽는다. 본존불의 수인과 크기는 인도 부다가야 대각사의 황금불과 같다. 이 황금불은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에 나온다.

국가유산청의 세계유산 안내 글은 석굴암의 구조를 이렇게 적는다. "전실은 방형, 주실은 원형인 석굴암의 구조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동양적 사상을 재현하였으며". 같은 누리집의 영문 설명도 설계를 다룬다. 이 설명에 따르면 석굴암은 황금비에 따라 설계되었다. 기본 단위는 약 30cm인 12당척이다.

이 설명은 석굴암의 가치를 셋으로 나눠 보게 해 준다. 불상의 모델, 공간에 담긴 사상, 설계의 비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석굴암이 현존하는 유일한 통일신라시대 인조 석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설명들은 국가유산청 누리집의 세계유산 안내 글에서 직접 읽을 수 있다.

『삼국유사』의 751년 기록과 1966년 석가탑 묵서지편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김대성은 진골 귀족이었다. 그는 745년(경덕왕 4)부터 750년(경덕왕 9)까지 중시(中侍)를 지냈다. 국가유산청은 『삼국유사』의 창건 기록을 전한다. 김대성은 751년에 현세와 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를 짓기 시작했다. 석불사는 지금의 석굴암이다. 김대성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774년에 국가가 완성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의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천개석으로 쓰려던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깨졌다. 김대성은 안타까워하다 잠이 들었다. 그사이 천신이 내려와 천개석을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1966년 석가탑 해체 때는 고려시대 묵서지편(墨書紙片)이 나왔다. 이 기록은 석가탑이 742년(경덕왕 1)에 세워져 혜공왕 때(765~780) 완성되었다고 적는다.

국가유산포털은 다보탑과 석가탑에 관한 기록도 전한다. 통일 뒤 신라로 온 고구려·백제 장인이 신라 장인과 함께 만들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751년에 공사를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묵서지편에는 석가탑을 742년에 세웠다고 적혀 있다. 두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보인다. 창건 연대를 하나로 정하기보다 기록마다 구별해 읽어야 함을 보여 준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화강암 삼층석탑 석가탑의 모습
경주 불국사 석가탑 (2022년) · Bernard Gagnon · CC0 · 위키미디어 공용

1688년 정시한의 방문부터 2014년 종합점검까지

국가기록원은 조선 시대 기록을 소개한다. 정시한이 1688년 5월 찾았을 때 전실과 후실의 석상은 온전했다. 『불국사고금창기』는 1703년(숙종 29)에 석굴암을 중수했다고 적는다. 이때 굴 앞에 돌계단도 쌓았다. 1758년(영조 34)에는 다시 중수했다. 정선이 1733년에 그린 『교남명승첩』에도 석굴암이 남아 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석굴암을 방문했다. 그 뒤 1913년에 중수가 시작되었다. 국가기록원은 이때부터 석굴암의 수난이 시작되었다고 적는다. 시멘트로 고치면서 환기구가 막혔다. 습기를 아래로 모으던 감로수도 없어졌다. 석굴에 습기가 차 불상에 결로가 생겼고 화강암이 침식되었다.

코리아중앙데일리에 따르면 1976년 훼손을 막는 유리벽이 설치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66년부터 해마다 두세 번 정기 점검을 해 왔다. 2012년 문화재청 보고서는 결함 56건을 기록했고 그중 25건이 본존불에 있었다. 2013년 이 신문의 조사에서는 본존불 대좌에 길이 1m의 수직 균열이 확인되었다. 2014년 종합점검에서는 천장 균열이 관찰되었다. 석굴암은 정밀 조사나 자동계측 모니터링이 필요한 대상으로 분류되었다.

석굴암과 불국사의 역사를 전하는 기록 비교
기록연도담긴 내용소개한 기관
『삼국유사』 창건 기록751년 시작, 774년 완성김대성이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를 짓기 시작했고 국가가 완성했다국가유산청
석가탑 묵서지편(고려시대)742년 조성, 1966년 발견석가탑이 혜공왕 때(765~780) 완성되었다고 적었다국사편찬위원회
정시한의 방문1688년 5월전실과 후실의 석상이 온전했다국가기록원
정선의 『교남명승첩』1733년석굴암을 그림으로 남겼다국가기록원
『불국사고금창기』1703년, 1758년석굴암을 중수하고 굴 앞에 돌계단을 쌓았다국가기록원
문화재청 보고서2012년석굴암 결함 56건 가운데 25건이 본존불에 있었다Korea JoongAng Daily

정리

본론의 기록들은 석굴암 보존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일임을 보여 준다. 1688년의 온전한 석상, 조선의 두 차례 중수, 1913년 이후의 손상이 이어진다. 그 뒤로 해마다 두세 번 점검을 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주실 위쪽 감실 10개 가운데 2구의 조각상은 지금 없다. 창건 연대와 불상 수처럼 자료마다 다르게 적힌 부분도 남은 질문이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지금은 석굴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관람객은 유리 너머로 본존불만 볼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석굴암이 동해를 마주하며 본존불의 방위각이 해 뜨는 각도와 거의 같다고 설명한다. 불국사에는 33천을 상징하는 청운교·백운교(국보 제23호)가 있다. 서방 극락세계로 이어지는 연화교·칠보교(국보 제22호)도 있다. 대웅전 앞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국보 제21호)은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에서 유래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석굴암 모형 속 본존불 좌상과 주변 벽 부조
서울 롯데월드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석굴암 모형 (2019년) · Ethan Doyle White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