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1995년 세계유산은 장경판전 건물이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것은 해인사 장경판전이라는 건물이다. 팔만대장경 경판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따로 등재되었다. 두 등재는 대상과 목록이 다르다. 등재를 결정한 회의도 다르다. 이 글은 17부작 가운데 2부다.
장경판전은 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국가유산청은 이 건물을 대장경의 부식을 막으려고 15세기경 지은 건축물로 설명한다. 그래서 1995년 등재의 초점은 건축과 보존 방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95년 베를린 총회의 장경판전과 2007년 프리토리아 회의의 경판
국가유산청 안내에 따르면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국가유산청은 그 근거로 문명사적·국가적·건축사적 가치를 든다. 1995년 12월 서울신문 기사는 등재가 이루어진 회의를 전한다. 그 회의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였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그해 등재가 권고된 한국 유산은 3건이었다. 나머지 두 건은 석굴암과 불국사, 그리고 종묘였다.
경판은 별도의 목록에 올랐다. 국가유산청은 경판이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고 적는다. 2007년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 기사에 따르면 이 등재는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회의는 6월 11일부터 15일까지 남아공 프리토리아에서 열렸다. 2017년 서울신문 기사는 목판이 모두 8만 1350장이라고 전한다. 한 장의 평균 무게는 3.5kg이고, 전체 무게는 285t이다.
두 등재를 항목별로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대상은 장경판전 건물과 목판이다. 목록은 세계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이다. 연도는 1995년과 2007년이고, 장소는 베를린과 프리토리아다. 1995년 기사의 권고 목록에는 '대장경판 및 판고'처럼 경판 이름도 함께 적혀 있었다. 그래서 두 등재가 하나로 섞여 기억되기 쉽다고 볼 수 있다.
국가유산청이 밝힌 등재기준 (ⅳ)·(ⅵ)과 보존과학의 평가
국가유산청 안내는 장경판전에 세계유산 등재기준 (ⅳ)와 (ⅵ)이 적용되었다고 적는다. 같은 안내는 기준 (ⅳ)를 이렇게 풀이한다.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이다.
국가유산청 안내의 장경판전 설명에는 다음 문장이 있다.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기준 (ⅳ)의 '과학적, 기술적' 발전이라는 말은 '보존과학 소산물'이라는 평가와 맞닿는다고 읽을 수 있다. 이 연결은 장경판전의 가치가 경판을 지키는 기능과 묶여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설명 전문은 국가유산청 누리집의 세계유산 안내 게시물에서 직접 읽을 수 있다.
앞뒤 창 크기와 숯·소금 바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가유산청의 설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백과사전이다. 이 사전은 장경판전을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로 적는다. 두 판전 가운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다. 사전에 따르면 칸마다 남쪽 창과 북쪽 창의 크기가 다르다. 위아래 창의 크기도 서로 다르다. 국가유산청은 앞뒤 창을 비대칭으로 두어 공기의 흐름을 제어한다고 설명한다.
바닥 설명은 두 자료가 조금 다르다. 국가유산청은 바닥층에 숯·석회·소금·황토를 차례로 섞어 깔았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흙바닥 속에 숯·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쌓아 다졌다고 적는다. 경판을 세우는 방식도 사전에 나온다. 경판은 두께의 두 배쯤 되는 마구리 사이에 끼워 판가에 세로로 세운다. 그래서 경판 사이로 공기가 흐른다.
두 자료를 나란히 보면 장치의 역할이 나뉜다. 창은 공기의 흐름을, 바닥은 습도를, 마구리는 경판 사이의 틈을 맡는 구조로 읽을 수 있다. 재료 목록의 작은 차이는 한 자료만 읽지 말고 원문을 함께 봐야 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1318년 선원사에서 1398년 해인사로, 그리고 1951년의 폭격 명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장경판은 1318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다. 그다음 1398년 해인사 장경판전으로 옮겨졌다. 사전은 그 배경으로 고려 말기의 잦은 외침을 든다. 2017년 서울신문 기사는 1360년 왜구가 강화도에 들어와 선원사 등을 약탈했다고 전한다. 이때 승려와 양민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기사는 이동 이유를 두고 두 주장이 있다고 소개한다. 하나는 외침을 피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의 정통성을 알리려는 기획성 행사였다는 주장이다.
건물의 연대도 기록에 남아 있다. 사전에 따르면 장경판전은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어졌다. 성종 19년(1488)에는 학조 대사(學祖)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짓고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95년 서울신문 기사는 1488년 명문 기와가 나와 건물이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한다. 문헌 기록과 기와가 같은 해를 가리킨다는 점은 연대를 읽는 두 갈래 근거로 볼 수 있다. 사전은 임진왜란 때 피해가 없었고, 1622년과 1624년에 보수가 있었다고 적는다.
2017년 서울신문 기사는 1951년의 일도 전한다. 김영환 대령은 1951년 8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중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김영환 대령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 이 대목은 장경판전의 기록이 건축 구조뿐 아니라 사람의 판단도 함께 전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 비교 대상 | 유산 구분 | 등재 결정 회의 | 1995년 서울신문 기사의 지정 표기 |
|---|---|---|---|
| 해인사 장경판전 | 세계유산(문화유산) | 1995년 독일 베를린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 | 판고 국보 제52호, 해인사 사적·명승 제5호 |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 세계기록유산 | 2007년 6월 남아공 프리토리아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 | 대장경판 국보 제32호 |
| 석굴암·불국사 | 세계유산(문화유산) | 1995년 독일 베를린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 | 석굴암 국보 제24호, 불국사 사적·명승 제1호 |
| 종묘 | 세계유산(문화유산) | 1995년 독일 베를린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 | 사적 제125호 |
정리
본론의 자료들은 장경판전을 두 겹으로 보게 한다. 한 겹은 창과 바닥, 마구리로 이루어진 보존 구조다. 다른 겹은 경판의 이동과 중창, 보수로 이어진 기록이다. 남은 질문도 있다. 경판이 1398년 해인사로 왔다는 기록과 1457년·1488년 중창 기록을 어떻게 이어 읽을지는 원문을 더 볼 대목이다.
현장에 가면 먼저 남쪽 수다라장과 북쪽 법보전을 나란히 보면 좋다. 그다음 칸마다 창 크기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수 있다. 서울신문 기사에 따르면 해인사 대적광전 바깥벽에는 '대장경 이운벽화'가 있다. 이 벽화는 개포에서 해인사로 경판을 옮기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벽화 앞에서 앞서 본 이동 기록을 떠올리면 경판의 긴 여정을 함께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