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대문은 수도를 지키려고 세운 문이다. 한양도성박물관(Seoul City Wall Museum)은 1396년 수도를 지키기 위해 한양도성 축조가 시작됐다고 적는다. 같은 설명문은 성벽이 18.6km였고 문 8개와 수문 2개를 두었다고 밝힌다. 또 도성이 수도와 지방을 나누는 물리적 경계이면서 왕권의 상징이었다고 적는다. 그래서 사대문은 방어와 경계 표시를 함께 맡은 시설로 볼 수 있다.
사대문의 이름은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이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은 이 네 문을 한양도성의 가장 중심적인 유적으로 소개한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각은 종루의 종소리로 정해졌다. 그 시각은 인정과 파루라는 이름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태조의 1395년 도성조축도감과 1422년 세종 때 개축
국가유산청 월간 국가유산사랑에 따르면 태조는 1394년 한양으로 천도했다. 태조는 먼저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해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를 정했다. 그다음 1395년에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해 도성을 축조했다. 같은 자료는 1396년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11만 8,070명을 동원해 49일 만에 1차 공사를 마쳤다고 적는다. 이어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7만 9,400명을 동원해 55일 만에 축성을 완료했다고 밝힌다.
서울특별시 한양도성 누리집은 처음 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을 97개로 나눴다고 설명한다. 각 구간의 이름은 천자문 순서를 따라 천(天)에서 조(弔)까지 붙였다. 공사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1396) 기사에는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 무너진 곳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그곳은 석성(石城)으로 쌓고 사이사이 토성(土城)을 쌓았다고 기록됐다. 같은 기사는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냈다고 적는다.
개축은 세종 때 이루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신편 한국사는 태종이 재위 중에도 개축을 기획했다고 적는다. 다만 백성의 노고를 염려해 자제했고, 세종에게 양위한 뒤 스스로 사업을 맡았다고 설명한다. 도성수축도감은 총 403,755명이 40일간 작업해야 한다고 계산했다. 국가유산청은 조선 8도에서 장정 32만 2,400명을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30일 동안 동원했다고 적는다. 우리역사넷은 세종 4년(1422) 2월 23일에 도성 개축을 끝냈다고 밝힌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기사에 적힌 문 이름과 속칭
문 이름이 적힌 1차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조 5년(1396) 기사는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라고 적는다. 같은 기사에는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라는 구절도 있다. 또 정서는 돈의문(敦義門), 서북은 창의문(彰義門)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동남의 광희문(光熙門)은 속칭 수구문(水口門)으로, 소덕문(昭德門)은 속칭 서소문으로 적혀 있다. 이 기사의 원문과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 직접 찾아 읽을 수 있다.
네 문의 기록은 항목별로 나란히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숭례문은 실록에서 정남의 문이고 속칭이 남대문이다. 둘째, 흥인지문은 실록에 흥인문으로 적혔고 속칭이 동대문이다. 셋째, 돈의문은 실록에서 정서의 문이며, 우리역사넷은 세종 때 서전문을 닫고 돈의문을 여는 작업을 했다고 적는다. 넷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북의 숙청문(肅淸門)이 1523년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됐다고 설명한다.
사소문 기록도 남아 있다. 서울특별시 한양도성 누리집은 창의문이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적는다. 그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 17년(1741)에 다시 세운 것이다. 우리역사넷은 세종 30년에 남대문 중수공사에 착수했다고 적는다. 또 문종 원년(1451) 정월에 동대문을 수리했으나 신통치 못해 10월에 다시 고쳐 짓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국가유산청 영문 설명은 17세기 책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들어 숭례문 현판 글씨를 양녕대군(1394~1462)이 썼다고 전한다.
인정 밤 10시와 파루 새벽 4시, 순성길을 돌던 세 군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문을 여닫는 방식을 설명한다. 태조는 1395년 도성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을 냈다. 그리고 8개의 문을 종루의 종소리에 맞추어 개폐하도록 했다. 종루는 현재의 종로와 남대문로가 교차하는 네거리에 설치했다. 인정은 매일 밤 10시경에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알린 것이다. 파루(罷漏)는 매일 새벽 4시에 33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린 것이다.
시각을 어기면 벌이 따랐다. 같은 사전은 인정 이후에 통행하다 적발되면 경수소(警守所)에 구금했다고 적는다. 이튿날 곤장을 때렸고, 형벌량은 10도에서 30도까지 어긴 시각에 따라 달랐다.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에 성벽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다고 설명한다. 또 사람들의 일상이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각에 맞춰졌다고 적는다. 장사꾼이나 나무꾼이 어느 문으로 드나들었는지는 이 자료들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서울특별시 한양도성 누리집은 조선 후기 순찰도 설명한다.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 세 군문이 각각 8패씩 내어 도성 주변을 순찰했다. 오늘날 백악산·숙정문 구간은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 4.7km이고 약 3시간이 걸린다. 백악(북악산)은 342m로 내사산 중 가장 높다. 이 구간은 1968년 1·21 사태 이후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됐다.
1915년 돈의문 철거와 2008년 숭례문 화재, 2013년 복구
한양도성박물관은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했다고 적는다. 또 일제가 근대화와 도시개발을 명목으로 문과 성벽을 철거했다고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소의문은 1914년, 돈의문은 1915년에 철거됐다. 철거된 자리에는 조선신궁(1925), 경성운동장(1925), 경성측후소(1932) 같은 식민 시설이 들어섰다. 국가유산청은 혜화문이 1939년 전차 부설과 함께 철거됐다가 1994년 북쪽으로 옮겨 새로 건설됐다고 적는다.
돈의문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은 돈의문이 일제강점기 도로 확장을 이유로 강제 철거되어 현존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정부가 복원을 추진했으나 막대한 예산과 교통난 같은 문제로 사업이 좌절됐다고 적는다. 그 대신 2019년에 돈의문을 디지털로 복원해 키오스크와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게 됐다. 국가유산청은 북대문인 숙정문 문루를 1976년에 새로 세웠다고 적는다.
숭례문은 다른 길을 걸었다. 국가유산청은 숭례문이 13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398년에 완성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고 적는다. 월간 국가유산사랑은 1448년에 중건했다가 1479년에 다시 개축했다고 밝힌다. 국가유산청은 2008년 2월 10일 20시 40분에 화재가 시작됐다고 적는다. 00시 40분경에 2층 지붕이, 01시 55분경에 석축을 제외한 전 구조가 소실됐다. 복구는 5년 2개월이 걸려 끝났고, 월간 국가유산사랑은 2013년에 복구되었다고 적는다.
| 문 이름 | 실록이 적은 방향과 속칭 | 기록에 남은 연도 | 현재 상태 |
|---|---|---|---|
| 숭례문(남대문) | 정남, 속칭 남대문 | 1396년 착공, 1398년 완공, 1448년 중건, 1479년 개축 | 2008년 화재, 2013년 복구 |
| 흥인지문(동대문) | 정동 흥인문, 속칭 동대문 | 문종 원년(1451) 정월 수리, 같은 해 10월 재시공 시작 | 확인 안 됨 |
| 돈의문(서대문) | 정서 | 세종 4년(1422) 개축 때 서전문을 닫고 돈의문을 엶 | 1915년 철거, 2019년 디지털 복원 |
| 숙정문(북대문) | 정북 숙청문 | 1523년 이후 숙정문으로 개칭 | 1976년 문루 새로 세움 |
| 창의문 | 서북 | 영조 17년(1741) 문루 다시 세움 |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 남음 |
정리
한양도성의 사대문은 두 가지 일을 함께 맡았다. 하나는 수도를 지키는 방어다. 한양도성박물관은 1396년 수도를 지키기 위해 축조가 시작됐다고 적는다. 다른 하나는 경계와 권위의 표시다. 같은 박물관은 도성이 수도와 지방을 나누는 물리적 경계이자 왕권의 상징이었다고 설명한다. 국가유산청은 전체 길이가 18.627km이며 그중 13.1km가 국가 사적으로 관리된다고 적는다.
문은 시간과 함께 모습을 바꿨다. 돈의문은 1915년에 철거되어 지금 없고, 2019년에 디지털로 복원됐다. 숭례문은 2008년 화재를 겪고 2013년에 복구됐다. 숙정문 문루는 1976년에 새로 세웠다. 더 확인하고 싶다면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와 국가유산청 자료를 함께 보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