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이로 째고 손으로 이은 실을 베틀로 짠 여름 옷감
한산모시는 모시풀 껍질을 이로 가늘게 째서 실을 만들고, 그 실을 이어 베틀로 짠 옷감이다. 국가유산청은 모시가 몸에 붙지 않고 까슬까슬해 여름 옷감으로 훌륭하다고 설명한다. 실을 만드는 과정은 사람의 이와 손에 기댄다. 이 글은 7부작 가운데 2부다.
이 기술은 충청남도 한산 지역의 여성들이 이어 왔다. 유네스코는 모시짜기를 여성이 이끄는 가족 단위 작업으로 설명한다. 마을 이웃들은 '모시 두레'를 꾸려 고된 노동을 함께 견뎠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그다음 201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올랐다.
1469년 『예종실록』의 생저와 앞니로 째는 모시째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시대 이전에는 '저마', 고려시대부터는 '모시'라는 이름을 썼다고 적는다. 한산모시는 백제 때 건지산의 야생 저마를 재배해 짠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사전은 1469년(예종 1) 『예종실록』에 한산과 임천의 생저(生苧)가 토산품으로 나온다고 적는다. 1751년에는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擇里志)』에서 '한산과 임천의 모시밭'을 언급했다. 같은 사전에 따르면 모시풀은 1년에 세 번쯤 벤다. 시기는 5월 말~6월 초, 7~8월, 10월 초~하순이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은 제작 과정을 차례로 적는다.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표백 순서다. 모시째기에서는 물에 적신 태모시를 앞니로 가늘게 짼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이 작업에 대해 "초보자는 입술이 갈라지고 혀에서 피가 나기도 한다"라고 적는다. 서울신문 기사는 한산모시가 칼 같은 도구 없이 윗니와 아랫니로 태모시를 짼다고 전한다.
짼 실은 길어야 2m 이내다. 그래서 실을 길게 잇는 모시삼기가 뒤따른다. 서울신문 기사는 실의 두 끝을 무릎에 대고 침을 묻혀 손바닥으로 비벼 잇는다고 전한다. 이 순서는 한산모시의 실이 도구보다 사람의 이와 무릎과 손바닥에 기대어 만들어진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래서 모시를 볼 때는 천의 결보다 먼저 실의 이음매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적은 움 속 베틀과 7~15새
모시실은 마르면 잘 끊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예전에는 땅을 파 만든 움에 베틀을 놓고 짰다. 요즘은 비닐을 치고 가습기나 분무기로 습기를 맞춘다. 서울신문 기사는 아무리 더워도 문을 꼭 닫고 눅눅한 상태에서 짜야 한다고 전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KOCIS(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도 영문 웹진에서 모시를 다룬다. 이 웹진은 실에 콩풀을 먹여 이음매를 매끄럽게 한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옷감의 촘촘한 정도를 '승(升)'으로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1승은 날실 80올이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한산모시를 보통 7새에서 15새까지 짠다고 적는다. 그중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부른다. 모시 한 필에는 대개 두 달이 걸리고, 베 짜기에만 약 4~5일이 든다. 걸리는 시간은 새수와 숙련도에 따라 다르다.
두 수치를 나란히 놓으면 베틀 앞의 며칠은 두 달 가운데 일부다. 나머지 시간은 베틀에 오르기 전후의 공정에 쓰인다고 볼 수 있다. 또 움에서 가습기로 도구가 바뀐 기록은 실이 마르지 않게 지키는 원칙이 그대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국가유산포털의 의례복·상복과 2009년 등재된 일본 에치고조후
국가유산포털은 모시가 의례복, 군복, 상복과 보통 사람들의 여러 옷에 쓰였다고 적는다. 유네스코 등재 결정문도 모시가 무더운 여름에 쾌적하다고 설명한다. KOCIS 웹진은 모시 옷이 귀하게 여겨져 대물림되었고 수의로도 쓰였다고 전한다. 같은 웹진에 따르면 여성들은 자투리도 버리지 않았다. 여성들은 그 자투리로 상보와 발, 조각보를 만들었다.
모시풀로 짜는 옷감은 일본에도 있다. 유네스코는 2009년 니가타현(Niigata)의 오지야치지미(Ojiya-chijimi)·에치고조후(Echigo-jofu) 제작 기술을 대표목록에 올렸다. 등재 연도는 일본 2009년, 한산 2011년이다. 실 쪼개기는 일본이 손톱, 한산이 앞니다. 표백은 일본에서 젖은 천을 눈 덮인 들판에 10~20일 펼친다. 쓰임은 같아서, 유네스코는 일본 직물도 가볍고 덥고 습한 일본 여름에 알맞다고 적는다.
중국과 견준 값의 기록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고려시대 중국에서 고려산 고운 저포는 한 필에 은 1냥(1냥 2전)이었다. 중국산은 두 필에 은 1냥 2전이었다. 동시에 실을 쪼개는 손의 방식과 표백 방식은 지역마다 달랐다고 읽을 수 있다.
1910년 『조선산업지』의 저포칠소와 2022년 기준 보유자
국가유산청은 1910년 발행된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이 책은 한산, 서천, 홍산, 비인, 임천, 정산, 남포 7군을 함께 묶는다. 그리고 이 일곱 군을 "모시의 제직이 주된 곳이므로 저포칠소(苧布七所)라고 칭한다"라고 적었다.
한산과 임천은 앞서 본 『예종실록』과 『택리지』에도 나온 이름이다. 국가유산포털은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한산모시가 처음 상업화되었다고 적는다. 그때부터 모시짜기의 주된 목적은 수익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여성 대부분은 14~15세부터 어머니나 시어머니에게 기술을 배웠다. 앞서 본 모시 두레는 주로 친척이나 마을 이웃끼리 꾸렸다. 국가유산포털은 두레를 가족과 이웃의 결속과 화합 수단으로 설명한다.
1967년 국가 지정 뒤에도 지정은 이어졌다. 1974년에는 '한산세모시짜기'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가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2016년 문정옥 보유자가 별세했다고 적는다. 그래서 2022년 기준 한산모시짜기 보유자는 방연옥 한 사람이다. 유네스코 등재 기록은 등재 당시 충청남도에서 약 500명이 모시짜기 관련 일을 했다고 적는다.
| 비교 대상 | 실 만들기 | 촉감·계절 | 공식 지정·등재 |
|---|---|---|---|
| 한산모시짜기(충청남도 한산) | 물에 적신 태모시를 앞니로 째고, 무릎 위에서 침을 묻혀 손바닥으로 이음 | 몸에 붙지 않고 까슬까슬하며 덥고 습한 여름에 알맞음 |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4호, 2011년 유네스코 대표목록 |
| 한산세모시짜기(충청남도 한산) | 같은 째기·삼기 공정을 거친 실로 10새 이상 촘촘히 짬 | 모시 옷감으로서 덥고 습한 여름에 알맞음 | 1974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
| 오지야치지미·에치고조후(일본 니가타현) | 모시 섬유를 손톱으로 쪼개고 손으로 꼬아 실을 만듦 | 가볍고 무늬가 있으며 덥고 습한 일본 여름에 알맞음 | 2009년 유네스코 대표목록 |
정리
본론에서 드러난 것은 한산모시가 옷감이기 전에 실의 기술이라는 점이다. 앞니로 째고 무릎에서 잇는 공정은 일본의 손톱 쪼개기와 나란히 놓을 때 더 또렷해진다. 『예종실록』에서 『조선산업지』까지 한산과 임천이 거듭 나오는 점도 눈에 띈다. 남은 질문은 보유자 한 사람과 약 500명의 종사자가 기술을 어떻게 나누어 잇는가이다.
원문은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네스코 무형유산 웹사이트에서 직접 읽을 수 있다. 국가유산포털에서는 제작 과정의 아홉 단계를 먼저 볼 만하다. 유네스코 웹사이트에서는 한산과 일본 에치고조후의 등재 설명을 나란히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