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대마 껍질로 짠 여름옷과 상복의 옷감

삼베는 대마 껍질로 실을 만들어 짠 옷감이다. 조선시대에는 서민의 여름옷과 상주의 상복에 쓰였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삼베 수의는 1934년 이후에 생긴 풍습이다. 이 글은 7부작 가운데 1부다.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은 이 과정 전체를 국가무형문화재 제140호 '삼베짜기'로 묶었다. 이 종목에는 대마라는 원료에서 삼베라는 직물을 짜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들어간다. 그래서 삼베를 이해하려면 베틀 앞의 일만 볼 것이 아니다. 밭과 솥에서 하는 일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곡성 기록, 한식 파종에서 삼삼기까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韓國民族文化大百科)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백과사전이다. 이 백과의 '곡성의 돌실나이' 항목은 대마를 기르는 시기를 적는다. 곡성에서는 4월 초순 한식 무렵에 대마를 심는다. 그다음 7월 초순 소서 뒤에 키가 2~2.5m가 되면 거둔다.

먼저 삼칼로 잎을 훑어 내고 줄기를 단으로 묶는다. 그다음 큰 솥에 세우고 멍석으로 싸서 1시간쯤 찐다. 예전에는 냇가 가까이 구덩이를 파고 돌을 쌓은 '삼굿'에서 쪘다. 찐 삼은 식기 전에 껍질을 벗겨 상·중·하로 나눈다. 말린 껍질을 가늘게 쪼개는 일은 '삼째기'이고, 쪼갠 올을 잇는 일은 '삼삼기'다.

경북 안동의 안동포(安東布) 설명도 같은 순서를 따른다.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는 대마를 거두어 잎을 떼고 줄기를 찐다고 적는다. 그다음 겉껍질을 벗겨 말린다. 이 기사는 안동 금소리가 모래흙이라 물이 잘 빠져 대마 재배에 알맞다고도 설명한다. 두 산지의 기록은 '찌기, 벗기기, 말리기'라는 같은 뼈대를 보여 준다. 산지가 달라도 실을 얻는 첫 단계는 같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시골 마당 솥에서 대마 줄기를 찌는 장면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시골 마당 솥에서 대마 줄기를 찌는 장면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

치자물로 물들인 곡성 삼베, 한산 모시·일본 모시와 무엇이 다른가

곡성 삼베의 특징은 색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곡성의 돌실나이' 항목은 그 특징을 이렇게 적는다. "삼실 타래를 정련한 후 치자물을 들여 옅은 황색으로 염색하고, 베를 매는 풀에도 치자물을 섞어 베를 짜는 것이 특징"이라는 대목이다.

이 대목은 두 단계를 말한다. 먼저 실 타래를 치자물로 물들인다. 그다음 베를 맬 때 쓰는 풀에도 치자물을 섞는다. 곡성 삼베의 베 폭은 약 30~32cm이고, 넓어도 35cm 정도다. 실과 풀 양쪽에 같은 물을 쓴다는 점은 곡성 삼베의 색이 짜기 전에 정해진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유네스코 자료의 모시 직물과 견주면 차이가 항목별로 보인다. 원료는 삼베가 대마이고, 한산 모시와 일본의 오지야치지미(Ojiya-chijimi)·에치고조후(Echigo-jofu)는 모시다. 실은 한산 모시가 삶고 표백한 섬유로 잣고, 일본 모시는 손톱으로 쪼개 손으로 꼰다. 베틀은 한산 모시가 전통 베틀이고, 일본 모시는 허리띠 베틀(back-strap loom)이다. 색은 곡성 삼베가 치자물로 들이고, 일본 모시는 젖은 천을 눈 덮인 들에 10~20일 펼쳐 바랜다. 같은 여름 옷감이라도 색을 더하는 길과 빼는 길이 따로 있었음을 보여 주는 비교다.

삼한 시대부터 입은 옷감, 새의 수와 상복과 수의

국가유산청은 삼베가 땀을 빨리 흡수하고 빨리 마른다고 설명한다. 통풍이 잘되고 열전도성이 커서 시원하다는 설명도 붙는다. 국가유산청 한국어 자료는 삼베를 삼한 시대부터 길쌈으로 입어 온 옷감이라고 적는다. 영문 공식 설명은 한국인이 '적어도' 삼한 시대부터 삼베를 짰다고 적는다. 두 판본을 나란히 보면 영문판이 시작 시점을 열어 두는 표현을 골랐다는 점이 드러난다.

코리아타임스는 조선시대(1392~1910)에 이 옷감으로 서민의 여름옷을 지었다고 적는다. 국가유산진흥원 자료는 삼베를 '새'의 수로 나눈다. 4~5새 농포는 농부의 옷감이나 장례용 상포였다. 6~7새는 중포이고, 9~12새 세포는 임금과 고위 관리의 옷감이었다. 곡성의 고(故) 김점순 보유자는 세 가지를 모두 잘 짰고, 12새에 이르는 고운 삼베도 짰다. 같은 삼베라도 새의 수에 따라 입는 사람이 달랐음을 보여 준다.

서울신문에 실린 정종수 칼럼은 삼베가 본래 상주의 상복이었다고 적는다. 부모를 여읜 자식이 '죄인'이라는 뜻으로 입었다는 설명이다. 같은 칼럼은 조선 성종 때 완성된 전례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수의를 모두 비단으로 한다고 했다고 전한다. 의례준칙(儀禮準則)은 1934년 1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가 만들어 공포했다. 서울시는 삼베 수의 풍습이 이 의례준칙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서울시는 그 전에는 고인이 생전에 입던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썼다고 적는다.

베틀에 걸린 옅은 황색 삼베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베틀에 걸린 옅은 황색 삼베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

삼베짜기 제140호와 곡성의 돌실나이, 오늘 어디서 볼 수 있나

국가유산청은 앞서 본 삼베짜기에 개인 보유자를 두지 않고 보유단체만 인정했다. 삼베가 마을 사람들의 협업으로 생산되고 전승된 집단 기술이라는 이유다. 인정된 보유단체는 경북 안동 지방에 속해 있다. 안동포는 조선 시대 궁중 진상품이었고, 지금은 지방특산물로 지정되어 있다. 영문 공식 설명도 안동 지역 삼베를 조선 왕실에 바친 공물로 적는다.

곡성의 돌실나이는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이름은 석곡의 옛 이름 '돌실'과 베 짜는 일을 뜻하는 '낳이'에서 나왔다. 곡성 삼베에 관한 기록은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 '물산'조에서 확인된다. 곡성 삼베가 일찍이 임금께 바치는 진상품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 돌실나이는 삼베짜기의 세부 기·예능으로 통합되었고, 제32호라는 지정 번호는 없어졌다.

코리아타임스는 삼베 짜기 전통이 1950년대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돌실나이를 잇던 양남숙의 전승 종목도 삼베짜기로 바뀌었다. 양남숙은 2020년 고령으로 명예보유자가 되었고, 국가유산진흥원은 이후 명맥을 잇기 어렵다고 적는다. 이 기술이 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기대어 이어진다는 점이 보유단체 방식과 함께 드러난다. 원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가유산청 누리집, 유네스코 무형유산 누리집에서 읽을 수 있다.

곡성 삼베와 안동포, 한산 모시, 일본 모시 직물을 원료·공정·쓰임·공식 기록으로 나란히 놓은 표
비교 대상원료실과 마무리계절과 쓰임공식 기록
곡성 삼베(돌실나이)대마삼째기·삼삼기로 실을 만들고 실 타래와 베풀에 치자물을 써 옅은 황색을 냄농포는 농부 옷감·상포, 세포는 임금·고위 관리 옷감1970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지금은 삼베짜기의 세부 기·예능으로 통합
안동포대마(안동 금소리 모래흙에서 재배)잎을 떼고 줄기를 찐 뒤 겉껍질을 벗겨 말림조선시대 서민 여름옷, 상복조선 시대 궁중 진상품, 지방특산물 지정, 삼베짜기 보유단체가 속한 지역
한산 모시모시수확·삶기·표백 뒤 실을 잣고 전통 베틀로 짬무더운 여름, 예복·군복부터 상복까지국가무형문화재 제14호,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일본 오지야치지미·에치고조후모시손톱으로 쪼개 손으로 꼬고 허리띠 베틀로 짠 뒤 눈 위에서 10~20일 바램덥고 습한 일본 여름에 맞는 가볍고 무늬 있는 고급 직물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정리

삼베를 따라가면 밭과 솥, 베틀, 장례가 하나의 줄로 이어진다. 곡성의 치자물과 안동의 진상 기록은 같은 삼베 안에서도 산지마다 다른 얼굴이 있음을 보여 준다. 수의를 둘러싼 기록은 '전통'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시점을 따로 따져 보아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남은 질문도 있다. 『여지도서』 '물산'조가 곡성 삼베를 어떤 말로 적었는지는 원문에서 직접 볼 대목이다. 현장에서는 베 폭과 새의 차이를 실물로 견주어 볼 만하다. 다른 옷감 이야기는 이어지는 부에서 다룬다.

여름 대청마루에 걸린 삼베 저고리을 설명하기 위한 AI 재현 이미지
AI로 재현한 일러스트 · 실제 사진 아님 — 여름 대청마루에 걸린 삼베 저고리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