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세습 대신 시험과 익명 채점으로 관리를 뽑고, 선비들의 삶과 길 문화를 바꾼 500년의 제도

조선시대 과거(科擧)는 고려 광종 9년(958) 도입된 이래 1392년 조선 건국부터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국가 관료를 선발한 핵심 등용문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과 병전(兵典)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르는 식년시(式年試)를 통해 소과(생원·진사시), 문과(대과), 무과, 잡과(역과·의과·음양과·율과)를 시행하도록 명문화했으며, 답안지의 이름을 봉인하는 봉미(封彌)와 서리가 답안을 붉은 글씨로 다시 베껴 필적을 가리는 역서(易書) 제도로 채점의 공정성을 지켰다.

지방 초시(향시)에 합격한 유생들은 한양 복시(覆試)를 치르기 위해 수주일 동안 걸어서 상경했는데, 특히 영남 선비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과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죽령을 피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聞慶)’는 뜻의 문경새재(조령)를 넘었다. 이 과정에서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 급제한 율곡 이이(구도장원공)와 80대 고령 급제자 같은 특별한 인물들이 탄생했고, 조선 후기에는 수만 명이 몰린 과장(科場)의 혼란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난장판(亂場判)’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1. 조선시대 과거시험이 특별했던 이유: 양인 개방 원칙과 봉미·역서의 이중 블라인드 채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조선 과거제가 동시대 세계 관료제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첫째 이유는 법제적 개방성과 다층 구조에 있다. 『경국대전』은 중죄인·탐관오리의 자손이나 재가(再嫁)·실행(失行)한 여인의 자손, 서얼(후대에 단계적 허용) 등 법적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원칙적으로 양인(良人) 이상이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유교 경전과 제술(논술)을 시험하는 소과(생원시·진사시)와 문과(대과)뿐 아니라, 활쏘기·기창·병서를 시험하는 무과(武科), 통역·의학·천문·법률을 다루는 잡과(雜科)를 나란히 운영해 문·무·실무 인재를 모두 시험으로 뽑았다.

정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 자·오·묘·유년 시행)는 정교한 3단계 검증을 거쳤다. 먼저 한양과 각 도(道)에서 인구 비례로 정원을 배정한 1차 시험 초시(初試, 지방은 향시·한양은 한성시)를 치렀다. 초시 합격자들은 이듬해 봄 한양에 모여 예조와 성균관 등에서 2차 본선인 복시(覆試)를 치렀으며, 문과의 경우 여기서 최종 33인을 선발했다. 마지막 3차 전시(殿試)는 국왕이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혹은 성균관 비천당 앞뜰에 친림해 직접 문제를 내고 갑과(甲科) 3인(1등 장원·2등 방안·3등 탐화), 을과(乙科) 7인, 병과(丙科) 23인의 순위를 매기는 최종 등급 결정 시험이었다.

무엇보다 조선 과거제가 특별했던 지점은 시험관의 사사로운 정실(情實)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한 이중·삼중의 익명 블라인드 채점 장치였다. 응시자는 거대한 두루마리 시험지인 시권(試券) 오른쪽 끝에 자신의 이름·나이·본관과 부·조·증조·외조의 4조(四祖) 인적 사항을 적고, 그 부분을 접어 풀로 단단히 봉인한 뒤 관인을 찍었다. 이를 ‘봉미(封彌)’ 또는 ‘미봉(彌封)’이라 불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채점관이 응시자의 필적(글씨체)을 알아보고 점수를 주는 부정을 막기 위해, 담당 관원이 봉미된 부분과 답안 본문 경계에 암호 글자(천자문 순번인 字號)를 매긴 뒤 봉미 쪽을 잘라 따로 보관(할봉·割封)하고, 서리(書吏)들이 답안 본문을 주사(朱砂, 붉은 먹)로 새 종이에 똑같이 베껴 썼다. 이 과정을 ‘역서(易書, 글씨를 바꿈)’라 했으며, 대조관(사동관)이 원본과 붉은 필사본(주초본)을 대조한 뒤 채점관(시관)에게는 오직 붉은 글씨로 베낀 답안지만 전달되었다. 채점이 모두 끝난 뒤에야 잘라 두었던 봉미를 맞춰 합격자의 이름을 확인했으니, 오늘날의 바코드 블라인드 채점과 다름없는 제도적 장치였다.

서울 성균관 내 비천당(丕闡堂) 전각의 단청 처마와 현판 전경
성균관 비천당(丕闡堂). 조선시대 임금이 성균관에 직접 거둥해 과거시험 문제를 내고 선비들을 시험하던 과거 고시장이자 대과 시험장 전각이다. · Christian Bolz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

2. 선비들의 한양 과거길 일정과 에피소드: 추풍령·죽령을 피해 문경새재를 넘은 까닭

가을철 각 도에서 치러진 향시(초시)에 합격하거나 성균관·궁궐에서 열리는 알성시·별시에 응시하려는 지방 유생들에게 ‘과거길(科擧길)’은 보름에서 한 달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선비들은 두루마리 시권용 고급 전통 한지와 붓·벼루·먹(문방사우), 짚신 여러 켤레, 비상식량인 미숫가루와 엽전을 괴나리봇짐에 묶어 메고, 머리에 전통 흑립(갓)을 쓴 채 한양도성 사대문을 향해 하루 평균 70~80리(약 30km)씩 걸었다.

이 머나먼 일정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에피소드가 바로 백두대간 소백산맥을 넘는 영남(경상도) 선비들의 고개 선택이었다. 영남에서 충청도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주요 고개는 세 곳이 있었는데, 동쪽의 죽령(竹嶺), 서쪽의 추풍령(秋風嶺), 그리고 가운데의 조령(鳥嶺, 문경새재)이었다. 그러나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완만한 추풍령이나 죽령을 굳이 피하고, 가장 험준한 해발 642m의 문경새재를 넘었다. 추풍령을 넘으면 ‘가을바람에 낙엽 떨어지듯(秋風落葉) 시험에서 떨어진다’고 꺼렸고, 죽령을 넘으면 ‘대나무 줄기처럼 미끄러져 낙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문경(聞慶)’은 글자 그대로 ‘경사스러운 합격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었기에, 선비들은 짚신이 닳아 해지도록 가파른 문경새재 제1관문(주흘관)·제2관문(조곡관)·제3관문(조령관) 옛길을 오르며 장원 급제를 기원했다.

과거길 도중 주막(酒幕)과 원(院)에서 벌어진 일화도 다채롭다. 수백 명의 유생이 한꺼번에 이동하는 철이면 영남대로와 호남대로변 주막은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노자가 떨어진 가난한 선비가 주막 주모에게 “이번에 장원 급제해 금의환향할 때 밥값을 갑절로 갚겠다”며 외상 장부를 달아 두고 떠나거나, 같은 고을 선비들끼리 도중의 안전을 위해 ‘동행계(同行契)’를 맺고 무리를 지어 산적과 호환(호랑이 피해)에 대비하기도 했다. 또한 선비들은 시험 당일 바로 한양에 도착하면 장거리 보행의 피로와 물갈이 때문에 붓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으므로, 시험일보다 최소 보름에서 한 달 먼저 한양에 입성해 성균관 주변 마을인 반촌(泮村)이나 친척집에 여장을 풀고 한양의 물과 음식에 몸을 적응시키며 예상 문제(초집·抄集)를 익혔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 명륜당(보물 제141호)과 앞마당의 노란 은행나무
서울 문묘와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보물 제141호). 조선 최고의 국립 대학이자 유생들이 강학하고 과거에 응시하던 핵심 공간이다. · Christian140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
경북 문경새재(명승 제32호) 제2관문 조곡관의 성문과 돌담 길
문경새재(명승 제32호)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영남 선비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과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죽령을 피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聞慶)’는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 과거길에 올랐다. · hyolee2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3. 조선 과거시험의 특별한 인물과 사건: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와 ‘난장판’의 유래

500년 조선 과거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기록을 남긴 인물은 단연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다.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록에 따르면, 이이는 13세(1548년)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생원시·진사시·문과 초시·복시·전시 등 아홉 차례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1등(장원)을 차지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특히 23세 때인 1558년(명종 13) 별시 초시에서 자연과 우주의 운행 원리 및 군주의 통치 도리를 논한 답안 『천도책(天道策)』은 시험관들조차 감탄해 중국 명나라 사신에게까지 전해질 만큼 명문으로 꼽혔고, 29세 때인 1564년(명종 19) 식년 문과에서는 초시·복시·전시 3단계를 연달아 1등으로 통과하는 ‘삼장장원(三場壯元)’의 대기록을 세웠다.

과거를 향한 조선 선비들의 집념은 최연소·최고령 급제 기록에서도 생생히 드러난다. 구한말의 문장가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은 15세(만 14세)의 나이로 186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소년 등과의 대명사가 된 반면, 평생을 과거에 매달려 백발 노인이 되어서야 합격증을 손에 쥔 이들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80세가 넘은 고령으로 과거에 응시하거나 급제한 노유(老儒)들에게 국왕이 특별히 직첩이나 홍패(紅牌, 붉은색 대과 합격 증서)·백패(白牌, 흰색 소과 합격 증서)를 하사하며 평생의 학문 정진을 위로한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현존하는 최고(最古) 수준의 실물 합격 증서 중 하나인 1435년(세종 17) ‘이임 무과 홍패’는 당시 급제자가 가문의 영광으로 홍패를 얼마나 소중히 보관했는지를 실물로 보여 준다.

한편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 응시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시험장(과장·科場)에서 벌어진 진풍경은 오늘날 일상 한국어 어휘의 기원이 되었다. 부정기 특별 시험인 별시(別試)·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가 열릴 때면 한양 성균관이나 춘당대 마당에 수만 명의 응시자와 구경꾼, 하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좋은 자리(양지바르고 시관의 눈에 잘 띄는 명당)를 선점하려는 ‘선접꾼(先接軍)’들이 전날 밤부터 시험장에 난입해 거대한 양산(우산)을 꽂고 진지를 구축하느라 패싸움이 벌어졌고, 글을 대신 지어주는 ‘거벽(巨擘)’과 글씨를 대신 써주는 ‘사수(寫手)’가 한 팀을 이뤄 대리 시험(차술·대작)을 치르는 폐단까지 나타났다. 이처럼 시험장이 통제 불능의 아수라장이 된 상태를 가리켜 ‘과장이 어지러워졌다’는 뜻의 한자어 ‘난장(亂場)’이라 불렀고, 여기에 판국이 더해져 오늘날 우리가 쓰는 ‘난장판(亂場判)’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실제로 1800년(정조 24) 인일제 등 후기 시험에서는 이틀 만에 1만 장이 넘는 시권이 접수될 만큼 과열이 극에 달했으며, 이러한 과거제의 구조적 한계는 마침내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과거제 폐지와 근대 관리 임용 제도로 이어지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강릉 오죽헌(보물 제165호) 경내에서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 전각
강릉 오죽헌 경내 문성사(文成祠). 아홉 차례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1등)으로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율곡 이이(1536~1584)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 User:Altostratus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1435년(세종 17) 무과 급제자 이임에게 발급된 붉은색 합격 증서 이임 무과 홍패
1435년(세종 17) 무과에 급제한 이임(李稔)에게 국왕 명의로 내려진 실물 합격 증서 ‘이임 무과 홍패(紅牌)’. 붉은 종이에 성적 등급과 이름, 발급 연월일이 적혀 있다. · 오모군 · CC BY 3.0 · 위키미디어 공용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4대 부문과 시험 절차·핵심 에피소드 비교
구분소과 (생원·진사시)문과 (대과)무과 (무관 선발)잡과 (기술관 선발)
시험 목적과 선발 인원성균관 입학 자격 및 하급 관리 기초 자격 부여 (식년시 기준 생원 100명·진사 100명)문관(문신) 관료 선발의 최고 등용문 (식년시 기준 최종 33인 선발)군사 지휘관 및 무관 선발 (식년시 기준 28인, 전란기 대폭 증원)역과(통역)·의과(의학)·음양과(천문·지리)·율과(법률) 전문 기술관 선발
시험 단계와 합격 증서초시(향시·한성시) → 복시 2단계 / 흰 종이에 적힌 ‘백패(白牌)’ 수여초시 → 복시 → 국왕 친림 전시(殿試) 3단계 / 붉은 종이에 적힌 ‘홍패(紅牌)’와 어사화 수여초시 → 복시 → 전시 3단계 (활쏘기·기창·병서 강독) / 문과와 동일하게 ‘홍패(紅牌)’ 수여초시 → 복시 2단계 (해당 관청 주관 실무·경서 시험) / 백패 수여
공정성 장치와 과장 풍속봉미(이름 봉인)·역서(붉은 먹 필사) 적용, 지방 선비들의 문경새재 과거길 대장정율곡 이이의 ‘구도장원공·삼장장원’ 기록, 조선 후기 거벽·사수·선접꾼으로 인한 ‘난장판’ 유래1435년(세종 17) ‘이임 무과 홍패’ 현존, 임진왜란 때는 수천 명을 한꺼번에 뽑는 별시 시행중인(中人) 계층의 전문직 세습 기반이자 실무 관료제의 핵심 축 담당

정리: 제도의 이상과 인간의 애환이 교차한 다섯 세기의 길

조선의 과거시험은 혈통만으로 관직을 독점하던 귀족 사회를 넘어, 경전 실력과 논술·무예·실무 능력으로 인재를 가려내려 했던 제도적 장치였다. 이름을 가리는 봉미와 붉은 글씨로 답안을 다시 베끼는 역서에는 시험의 공정성을 지키려 했던 치열한 고민이 담겨 있고, 추풍령과 죽령 대신 가파른 문경새재를 넘던 선비들의 발걸음에는 한 장의 홍패에 가문과 일생을 걸었던 간절함이 서려 있다.

동시에 아홉 번 장원 급제한 율곡 이이의 학문적 성취부터 조선 후기 과장을 뒤덮은 우산 물결과 ‘난장판’의 소동까지, 과거시험은 조선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가장 극적으로 압축한 무대였다. 오늘날 성균관 비천당·명륜당과 문경새재 옛길을 걸으며 옛 선비들의 여정을 따라가 보면, 시험을 통해 공정한 기회를 꿈꾸었던 옛사람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