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영국 RUSI는 청렴과 겸손을 함께 적는다
짧은 답부터 적는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 RUSI)는 팟캐스트에서 이순신(Yi Sun-sin)을 '한국 최고의 지휘관'으로 다뤘다. RUSI는 '위대하다'고 불리는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이순신이 군사적 역량과 함께 청렴과 겸손으로 기억된다고 설명한다. 그 에피소드는 해군사 연구자 석영달 소령(박사)의 분석으로 구성됐다. 석영달 박사는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에서 해군사와 전략을 가르친다.
국내 기관의 기록은 같은 인물을 다른 각도에서 적는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은 난중일기를 친필 일기로 적고 국보 제76호로 표기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 『군사』는 노량해전을 따로 분석한다. 이 글은 이 기관들의 기록만 근거로 삼는다.
난중일기,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친필 일기 7책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은 난중일기를 이렇게 적는다. 이순신이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 군중 생활을 직접 기록한 친필 일기다. 같은 자료는 이충무공 친필본 난중일기를 1건 7책으로 적고 국보 제76호로 표기한다. 원래는 모두 8권의 책이었다. 지금은 1595년 을미일기를 뺀 7책이 전해진다. 기록 범위는 1592년 1월 임진왜란 발발부터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다.
등재 시점은 두 기관이 함께 적는다. 국가유산청은 2013년 6월 광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등재됐다고 적는다. 회의 날짜는 6월 18일부터 21일까지로 적혀 있다. 대한민국 정부 해외홍보문화원이 운영하는 Korea.net도 난중일기가 2013년 유네스코 국제등재목록에 올랐다고 적는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데이터베이스에도 난중일기 항목이 있으나, 그 소개문의 원문 구절은 이 글을 쓰는 동안 확인되지 않는다.
국가유산포털의 설명문에는 다음 문장이 있다. "『난중일기』는 개인의 일기 형식의 기록이지만, 전쟁 기간 중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 직접 매일 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 소회를 현장감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물이다." 이 문장은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의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 항목에서 직접 읽을 수 있다. 같은 유산 항목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Korea.net이 적는 1566년의 결심과 1591년의 임명
Korea.net은 이순신의 경력을 연도로 적는다. 먼저 1566년에 그는 무관이 되기로 결심하고 군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다음 1576년에 군에 들어갔다. 1591년에는 46세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됐다. 결심부터 임명까지 25년이 지난 셈이다.
RUSI는 그 사이의 다른 장면을 적는다. RUSI는 이순신이 능력을 시기한 상관들로 인해 두 차례 부당하게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백의종군했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1592년에 침략에서 나라를 구하라는 부름에 응했다고 적는다. 두 기관의 서술을 나란히 놓으면, 해외 기관이 주목한 지점은 승진 기록보다 좌절 뒤의 복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거북선 통설과 15세기, 그리고 명량해전의 12척
거북선을 둘러싼 통설은 기록과 차이가 있다. Korea.net은 많은 사람이 이순신이 거북선을 발명했다고 말한다고 적는다. 그러나 같은 기사는 이 형태의 배가 15세기부터 한반도에 있었다고 적는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세계 최초로 알려진 장갑선을 개발해 전장에 투입했다고 적는다. 두 서술은 '누가 발명했는가'와 '어떤 배가 있었는가'를 나눠 읽을 때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전투 규모의 숫자는 Korea.net에서 확인된다. Korea.net은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열두 척 남짓한 배로 일본 함선 333척과 맞섰다고 적는다. RUSI는 15세기와 16세기를 해전에서 전례 없는 창의성이 나타난 시기로 본다. 국가유산포털은 임진왜란에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와 유럽의 용병이 참전한 사례도 발견된다고 적는다.
1706년 현충사와 1932년 중건, 기관마다 다른 기록 항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학술지 『군사』에 실린 연구는 노량해전을 좁혀서 다룬다. 이 연구는 노량해전이 임진왜란 중 유일한 조명연합작전이었다고 적는다. 이순신이 리더십으로 진린(Chen Lin)이 지휘하는 명 수군을 전투에 끌어들였다고도 적는다. 승리 요인으로는 선점 전략과 일본군을 노량해협으로 유인한 전술이 꼽힌다. 같은 연구는 전사 지점을 관음포 근방으로, 전사 시각을 새벽으로 추정한다. 기함에 있던 송희립(Song Hui-rip)이 전사를 수습하고 전투 중 지휘를 이어갔다고도 적는다.
추모 공간의 연혁은 국가유산청 현충사관리소가 적는다. 현충사는 1706년 숙종 때 건립됐다. 그다음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어 유허비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충무공 묘소 위토 경매 사건을 계기로 전국민이 모은 성금으로 1932년에 중건됐다. 1967년 성역화 지시로 현재의 현충사가 세워졌고, 기존 건물은 '구 현충사'로 불린다. 현충사의 영정은 1953년 작품으로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됐고, 탄신일인 매년 4월 28일에 정부 주관 제전이 열린다.
같은 인물을 다루지만 기관마다 적는 항목이 다르다. 영국의 RUSI는 성품과 복귀 과정, 임진왜란의 종결을 적는다. Korea.net은 1566년과 1576년, 1591년 같은 연도와 전투 규모를 적는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은 난중일기의 책 수와 국보 지정 번호, 등재 연도를 적고, 아산 이충무공 유허의 영문 명칭을 Historic Site Related to Yi Sun-sin, Asan으로 적는다. 같은 포털은 그 소재지를 충남 아산시 염치읍 48로, 관리단체를 국가유산청 현충사관리소로 적는다. 『군사』는 노량해전의 작전 성격과 전사 지점, 전사 시각을 다룬다.
| 기관·문헌 | 다루는 범위 | 기록된 수치·연도 |
|---|---|---|
|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팟캐스트 | 청렴과 겸손, 두 차례 군법회의와 백의종군, 임진왜란 종결 | 6화, 1592년, 거북선 열두 척, 15~16세기 |
| Korea.net(대한민국 정부 해외홍보문화원) | 경력 연도, 거북선 통설, 명량해전 규모, 전사 | 1566년, 1576년, 1591년 46세, 12척 대 333척, 1598년, 2013년 등재 |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난중일기 체재와 지정, 장갑선, 아산 이충무공 유허 | 1건 7책, 국보 제76호, 1592.1.1~1598.11.17, 2013년 6월 18~21일 |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 노량해전의 작전 성격과 전사 상황 | 유일한 조명연합작전, 관음포 근방, 새벽 |
| 국가유산청 현충사관리소 | 현충사 연혁, 영정, 제전, 활터 | 1706년, 1868년, 1932년, 1967년, 1953년 작품·1973년 지정, 4월 28일, 145m(당시 200m) |
| UNESCO 세계기록유산 소개 페이지 | 난중일기 항목 수록 | 확인 안 됨 |
정리
정리하면, 해외 기관과 국내 기관은 이순신의 다른 면을 각각 적는다. RUSI는 이순신이 열두 척의 거북선과 명 수군의 지원으로 일본 함대를 격파해 임진왜란을 끝냈고, 그 승리로 목숨을 잃었다고 기술한다. Korea.net은 그가 1598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적는다. 『군사』는 그 전투를 노량해전으로 좁혀 분석하고, 승리가 주변국에 조선 수군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적는다.
그러므로 '위대함'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보다, 어느 기관이 무엇을 적었는지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의 책 수와 국보 번호는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서 확인된다. 등재 연도는 같은 포털과 Korea.net에서 확인된다. 노량해전의 작전 성격은 KCI에 실린 『군사』 논문에서 확인된다. 그 밖의 평가는 이 글이 사용한 기록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