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답
잡상(雜像)은 궁궐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에 올린 장식기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를 인용해 이를 10신상(神像)이라 부른다. 이 신상들은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인물과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으로 설명된다. 그 목적은 살(煞)을 막는 데 있다고 한다.
잡상은 아무 지붕에나 올라가지 않았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설치 건물을 궁궐과 도성 성문, 종묘, 성균관 등으로 한정한다. 민가와 사원, 서원, 지방향교에는 잡상을 두지 않았다. 이 글은 잡상의 이름과 개수, 설치 범위, 중국 척수(脊兽)와의 차이를 다룬다.
『조선도교사』가 적은 잡상의 자리와 목적
『조선도교사』의 설명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잡상' 항목에 인용되어 있다. 이 대목은 잡상을 "궁궐의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 위에 놓은 10신상(神像)"이라고 정의한다. 목적에 대해서는 "살(煞)을 막기 위함이라 한다"고 적는다. 문장 끝의 '~이라 한다'는 전해지는 설명을 옮기는 말투다.
이 정의에서 먼저 볼 말은 '추녀마루'다.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르면 궁궐 용마루 양 끝에는 용두·취두·치미가 놓인다. 잡상은 용두와 함께 추녀마루나 내림마루에 놓인다. 따라서 잡상은 용마루 끝이 아니라 추녀마루와 내림마루의 장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구별은 지붕 장식 여러 종류를 한 이름으로 묶어 부르지 않게 해 준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장식기와의 뜻을 두 갈래로 설명한다. 하나는 건물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는 장식적 의미다. 다른 하나는 "재앙과 악귀를 막아주는 주술적인 의미"다. 『조선도교사』 인용문은 이 가운데 살을 막는 쪽만 말한다.
두 자료를 나란히 놓으면 잡상은 꾸밈과 막음을 함께 맡은 사물로 읽을 수 있다. 어느 의미가 먼저였는지는 이 자료들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살'이라는 낱말은 10신상의 이름 안에도 다시 나온다.
『어우야담』이 전하는 10신상의 이름
『어우야담(於于野談)』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10신상 이름의 근거로 드는 문헌이다. 이 문헌은 신임관(新任官)이 선임관들에게 첫인사하는 자리를 전한다. 그 자리에서 신임관은 대궐 문루 위 10신상의 이름을 외워야 했다. 기록은 그 조건을 "단숨에 10번 외워 보여야 받아들여진다"고 적는다.
열 이름의 앞 다섯은 대당사부(大唐師傅), 손행자(孫行者),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 마화상(麻和尙)이다. 뒤 다섯은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다.
이 일화는 잡상 이름이 관원 사회의 첫인사 의례에 쓰였음을 보여 준다. 단숨에 외우게 했다는 점은 그 이름들이 관원이 알아야 할 지식이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조선도교사』는 10신상이 『서유기』 인물과 토신을 형상화했다고 했다. 그러나 열 이름 가운데 어느 것이 인물이고 어느 것이 토신인지는 이 자료들로 하나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여섯째 이름 삼살보살의 '삼살'에는 따로 풀이가 있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삼살을 세살(歲煞)·겁살(劫煞)·재살(災煞) 등으로 설명한다. 그 뜻은 "살이 끼어서 불길한 방위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풀이는 잡상이 살을 막는다는 『조선도교사』의 설명과 같은 낱말을 쓴다. 신상의 이름 하나에도 살을 다루는 생각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궁궐영건의궤』와 상와도가 말하는 잡상의 개수
잡상의 개수는 두 종류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여러 『궁궐영건의궤』를 근거로 든다. 이에 따르면 경희궁·창경궁·창덕궁에 각각 112개·168개·148개의 잡상을 한번에 들여왔다. 의궤는 그 단위를 개(箇, 介)로 적었다.
남아 있는 건물의 수는 지붕 한쪽을 기준으로 센다. 숭례문(崇禮門, 1448)은 9개,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1906)은 10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두고 "지붕 한쪽에 올려놓은 수가 4∼11개로 제각기"라고 적는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그 이유를 기와마루의 길이에서 찾는다. 마루 길이에 따라 잡상의 수가 늘거나 줄며, 최소 수는 3좌라고 한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한국정신문화원이 소장한 상와도도 인용한다. 상와도에 따르면 잡상은 마루 끝에서 위로 올라가며 대당사부부터 순서대로 놓인다. 개수에 대해서는 "보통 3좌가 기본이고 그 다음은 5, 7, 9 등 홀수로 설치되어 있습니다"라고 적는다.
상와도의 홀수 원칙과 실제 건물의 수는 꼭 맞지 않는다. 덕수궁 중화전의 10개는 짝수이고, 4∼11개라는 범위에도 짝수가 들어 있다. 이 차이는 문서의 기준과 지붕 위 실물을 구별해 읽어야 함을 보여 준다. 짝수가 생긴 까닭은 이 자료들로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의궤의 세 자리 수치는 한 궁궐 안 여러 지붕에 잡상이 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국가유산청 자료로 본 잡상의 설치 범위
국가유산청 자료는 잡상을 올린 건물을 하나하나 든다. 궁궐의 정전과 왕의 침전, 궁궐의 정문, 궁궐 안의 누정이 있다. 도성의 성문, 왕릉·왕비릉의 정자각, 종묘, 성균관, 동묘도 들어 있다. 그리고 "민가, 사원, 서원, 지방향교 등에는 잡상을 설치하지 아니하였다"고 덧붙인다.
같은 자료는 이 한정에서 결론을 끌어낸다. 원문은 "잡상은 취두 치미 용두 등과 함께 왕궁의 상징이 된 것이다"라고 맺는다. 이 문장은 설치 범위가 좁았다는 사실을 상징의 근거로 든다. 왜 처음부터 궁궐 관련 건물에만 쓰도록 했는지는 이 문장에 적혀 있지 않다.
앞서 본 장식기와의 권위 의미와 함께 읽으면 하나의 해석이 가능하다. 잡상은 그 건물이 왕실·도성과 이어진 곳임을 알리는 표지로 볼 수 있다. 목록에는 성균관이 있지만 서원과 지방향교는 빠져 있다. 이 대비는 잡상이 지붕 위에서 건물의 위상을 구별하는 데 쓰였다고 읽게 한다.
중국어 위키백과 '脊兽'로 본 척수의 기원과 기능
중국의 지붕 장식은 척수(脊兽)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중국어 위키백과 '脊兽' 항목은 그 기원을 당대(唐代)의 세 가지 기와에서 찾는다. 치미(鸱尾), 수면와(兽面瓦), 교두통와(翘头筒瓦)다. 이 가운데 교두통와가 준수(蹲兽), 곧 선인주수(仙人走兽)로 변했다고 설명한다.
같은 항목은 척수의 첫 기능을 실용에서 찾는다. 원문은 "其功能最初是为了保护木栓和铁钉"이라고 적는다. 우리말로 옮기면 '그 기능은 처음에 나무못과 쇠못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항목은 그 보호가 누수와 녹을 막는 일이었다고 설명한다.
척수는 뒤에 장식 기능과 엄격한 등급 의미를 얻었다. 건물 등급에 따라 척수의 수와 형식이 엄격히 제한되었다고 한다. 놓는 자리도 마루마다 달랐다. 정척(正脊)에는 문수(吻兽)나 망수(望兽), 수척(垂脊)에는 수수(垂兽), 창척(戗脊)에는 창수(戗兽)를 놓는다. 마루 가장자리에 놓는 것이 선인주수다.
한국 자료는 잡상을 살을 막는 주술과 건물의 권위로 설명한다. 중국어 위키백과는 못을 보호하던 부재가 장식과 등급 표지로 바뀐 흐름을 말한다. 두 설명은 비슷한 자리의 장식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다고 읽을 수 있다. 한국 잡상에도 이런 실용 기능이 있었는지는 이 글의 자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영어 위키백과로 본 한·중 비교
첫째, 행렬의 맨 앞이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중국에 선인상 외에 주수상 10상이 있다고 적는다. 용·봉·사자·기린·천마·해마·고기·해치·후·원숭이이며, 선인상과 합하면 11상이다. 한국 실물에 대해서는 "선인상 또는 대당사부 현장상이 아예 없으며 손오공상이 가장 앞에 놓여 있다"고 적는다.
이 구절은 앞서 본 상와도의 순서와 겹쳐 읽을 때 의미가 커진다. 상와도는 대당사부를 마루 끝 첫자리에 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한국 실물에는 그 첫자리 상이 없다. 이 구절은 문헌의 배치와 남은 실물이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준다.
둘째, 개수를 정하는 기준이 다르다. 영어 위키백과 'Imperial roof decoration' 항목은 중국 신수가 보통 홀수라고 적는다. 신수의 수는 그 건물에서 하는 업무의 중요도를 나타내며, 최대 9마리라고 한다. 태화전에는 열 번째 상인 항십(行什)이 더해졌고, 제정 시기에는 이 건물에만 있었다고 한다. 중국 자료는 수로 업무의 무게를 말하고, 한국 자료는 마루 길이를 말한다는 점이 대비된다.
셋째, 허용 범위가 조금 다르다. 같은 영어 항목은 궁궐·관청·일부 사원 같은 공식 건물만 이런 장식을 쓸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한국 자료는 사원을 설치 대상에서 뺀다. 넷째, 남은 자료의 시기가 다르다. 중국의 잡상 자료는 요대(遼代) 9세기 말부터로 여겨지고, 명·청대에 유행했다. 한국은 19세기 이후 실물만 남아 있다.
『경국대전』의 잡상장과 숭례문 잡상이 남긴 단서
잡상을 만든 사람에 대한 기록도 있다.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르면 『경국대전』은 잡상장을 와서 소속으로 4명 두었다. 같은 기록에서 와장은 40명이었다. 원문은 "와장은 40명으로 직종을 구분하였다"고 적는다.
잡상이 기와를 다루는 관청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읽을 수 있다. 이 점은 국가유산청 자료가 잡상을 장식기와로 분류한 것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상의 크기도 적는다. 손오공상은 높이 40㎝쯤이고, 그 밖의 상들은 28∼32㎝다. 앞서 본 대로 손오공상은 한국 실물 행렬의 맨 앞에 놓인다. 첫 상만 따로 크다는 점은 행렬 안에서 첫자리가 구별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숭례문 잡상을 근거로 시기를 추정한다. 원문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잡상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는다. 이 문장은 단정이 아니라 추정의 말투를 쓴다. 또 숭례문 건물의 연대는 1448년이지만, 한국 잡상 실물은 19세기 이후 것만 남았다고 한다. 건물의 연대와 지붕 위 잡상의 연대는 구별해 읽어야 한다. 한편 잡상을 '어처구니'라는 말과 잇는 이야기는 이 글이 쓴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 문헌 | 전하는 곳 | 이 글에서 쓰는 대목 | 다른 문헌과의 차이 |
|---|---|---|---|
| 『조선도교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잡상' 항목 인용 | 10신상이 『서유기』 인물과 토신을 형상화해 살을 막는다는 설명 | 목적을 말하지만 인용문에 개별 이름은 없다 |
| 『어우야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잡상' 항목 인용 | 신임관이 10신상 이름을 외운 일화와 열 이름 | 이름과 순서를 전하지만 개수 규칙은 말하지 않는다 |
| 『궁궐영건의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잡상' 항목 인용 | 경희궁·창경궁·창덕궁에 112·168·148개를 한번에 들여온 기록 | 지붕 한쪽 수가 아니라 한 궁궐에 들인 수를 적는다 |
| 상와도 | 한국정신문화원 소장, 국가유산청 자료 인용 | 대당사부부터의 순서, 3좌 기본과 홀수 설치 | 실물의 4∼11개, 중화전 10개와 어긋난다 |
| 『경국대전』 | 국가유산청 자료 인용 | 와서 소속 잡상장 4명, 와장 40명 | 잡상 자체가 아니라 만드는 사람을 적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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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잡상을 읽는 일은 문헌과 지붕을 오가는 일이다. 『어우야담』은 이름을, 상와도는 순서와 홀수 원칙을, 의궤는 들여온 수를 남겼다. 실제 지붕의 수는 4∼11개로 제각각이고, 첫자리에는 대당사부가 아닌 손오공상이 있다. 이 어긋남은 잡상이 하나의 도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물임을 보여 준다. 중국 척수와 비교하면 비슷한 자리의 장식에 붙은 설명이 나라마다 달랐다는 점도 드러난다.
문헌에 적힌 열 이름과 상와도의 배치 순서, 그리고 실제 지붕 위에 남은 실물의 구성을 나란히 대조해 보면 시대별 변화가 더욱 뚜렷해진다. 의궤와 상와도 같은 원자료를 실제 궁궐 지붕과 비교하며 관람하면 잡상의 세부 특징을 한층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